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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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1부 영화

‘승리’를 뜻하는 ‘Victory’, ‘제물’을 뜻하는 ‘Victim’, ‘외계인’을 뜻하는 ‘Visitor’ 등 다양한 의미를 상징하는 미니시리즈 ‘V’의 오프닝은 전투 장면입니다. 열혈 카메라맨 마이크는 조수 토니와 함께 엘살바도르에서 목숨을 걸고 반군의 교전을 취재합니다.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반군 지도자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포부를 마이크의 카메라 앞에서 밝히며, 권총으로 헬기를 격추시키는 괴력과 강한 의지를 과시합니다. 엘살바도르 반군은 이후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레지스탕스를 상징하는 것이며, 헬기에 단신으로 맞서는 반군 지도자의 모습은 제2부에서 줄리엣에 의해 반복됩니다. 또 다른 헬기에 의해 추격당하던 마이크는 기총에 정조준당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헬기는 급히 후퇴합니다. 거대 UFO가 상공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위험을 즐기는 주인공 마이크의 캐릭터와 함께 전투 장면을 제시하여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결정적인 순간에 UFO를 등장시켜 이것이 ‘현실 속 외계인 이야기’임을 주지시킵니다. 하지만 기억을 돌이켜보면 1984년 국내 첫 TV 방영 당시, 엘살바도르 반군이 등장하는 오프닝은 삭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슬 시퍼런 5공 군사정권 시절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전체주의적인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정치 스릴러가,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라는 이유로 공중파를 탄 것만 해도 다행스러우며,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컬합니다.

‘V’는 매우 직선적인 정치 스릴러입니다. 핏빛 제복을 빼입고 인류 절멸과 지구 정복을 꾀하는 외계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그 자체입니다. 자신들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격리하고 처단하며 공공의 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모습은 나치가 유태인을 다뤘던 방식을 연상케 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에이브라함의 입을 통해 외계인의 정체가 나치와 동일함을 폭로하며, 그들과 싸우기 위한 상징 ‘V’를 부여받는 것 또한 매우 상징적입니다. 우호를 강조하며 지구인을 속이는 외계인의 선전용 포스터 또한 나치의 방식 그대로이며, 다니엘이 가입하여 갈색 제복을 지급받는 ‘외계인의 친구들’은 나치 유겐트와 닮았고, 심지어 외계인의 심볼 마크도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와 닮았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구 열강에 의해 경쟁적으로 자행되던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개척과도 닮았습니다. 과거 인류 조상의 두개골과 거대 UFO가 대비되는 오프닝은, 다윈의 진화론이 정치적으로 윤색된 사회진화론을 연상시키며, 아울러 ‘V’가 종(種)과 종 사이의 명운을 건 대결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대사를 통해 영화 ‘ET’와 ‘미지와의 조우’가 언급되지만, 차라리 그보다는 외계인이 지구의 공장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취주악단에 의해 연주되는 ‘스타워즈’의 메인테마가 보다 작품의 본래 성격에 가까운 것입니다.

‘V’는 SF 정치 스릴러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주의적 성격을 강한 작품입니다. 1980년대 한국과 달리 미국은 이미 드라마에서 이혼, 동거, 결별 등 가족 해체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시청자, 특히 이 시리즈에 매료된 어린 시청자들은 ‘V’에서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이크는 아내와 아들 숀과 별거한 상태이며 동료 여기자 크리스틴과 애매한 연인 사이입니다. 마이크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마이크의 어머니 엘리노어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상태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줄리엣 역시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지만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평범한 가족도 등장합니다. 로버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로빈을 비롯한 세 딸이 행복한 맥스웰 집안은 온전한 가정입니다.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않지만 아버지 케일럽과 두 아들 벤과 일라이어스의 테일러 집안도 끈끈한 가족입니다. 가면 갈수록 붕괴되지만 유태인 학살을 체험한 에이브라함과 아들 스탠리, 손자 다니엘의 번스타인 집안도 겉은 멀쩡합니다. 그러나 외계인에게는 가족이 없습니다. 외계인 지도자 존과 다이애나의 가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다이애나는 스티븐과의 대화에서 (후속 19부작에서도 끝끝내 등장하지 않는) 외계인의 영도자와 치정 관계라는 사실이 암시될 뿐입니다. 스티븐과 마틴, 바바라의 가족 관계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19부작 후반부에서 마틴의 쌍둥이 형제 필립이 등장하지만 억지스런 설정이며 오리지널 5부작에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브라이언이 로빈과의 사이에서 딸 엘리자베스를 낳지만, 아버지의 자격을 갖지 못하고 아내가 되어야 할 로빈에게 살해당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외계인 중 가장 심성이 착한 윌리엄은 케일럽을 구하고 사실상 그의 장남 벤의 빈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V’는 대하드라마에 맞먹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인간 드라마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각각의 캐릭터들은 매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덕분에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라는 소재를 다뤄 자칫 허황될 수 있는 ‘V’에 사실성을 불어 넣습니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하드보일드한 이야기 속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며, 하나의 캐릭터의 생과 사가, 마치 인계철선처럼 다른 캐릭터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V’를 거대한 하드보일드 느와르라고 한다면, 외계인의 정체를 홀로 파헤치는 등 모험적이며,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기보다 충동적이고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마이크를 탐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섹시하며 지적인 다이애나는 팜므 파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부 중반부에서 UFO 모선을 취재한 뒤, 마이크와 크리스틴의 섹스가 암시되는데, 이를 감시하는 듯한 TV 화면 속의 다이애나의 시선은 차후 마이크와 다이애나가 증오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각별한 인연으로 얽힐 것이라는 복선입니다. 마이크의 마음이 줄리엣에게 돌아서는 제2부 이후부터는 마이크와 줄리엣, 다이애나의 관계는 긴장감 넘치는 노골적인 삼각관계가 됩니다. ‘V’의 하드보일드적 성격은 등장인물들이 마구 죽어나간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제1부가 마무리되며 레지스탕스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외계인의 공격으로 벤이 살해당하는데, 이로써 줄리엣은 동료를, 케일럽은 아들을, 일라이어스는 형을 잃었기에, 외계인과 싸워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SF’라면 말랑말랑하여 어린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박살낸, 철저한 성인 취향에서 ‘V’는 출발합니다.

정체가 파충류인 외계인들이 포유류를 산 채로 섭취한다는 설정에서부터 ‘V’는 고어물이기도 합니다. 긴 혀를 날름거리며, 초록색 피부를 노출하고, 생쥐를 살아있는 채로 삼킨다는 설정에 당시 시청자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CG를 활용한 특수효과의 기술적 완성도가 극에 달한 현시점에서, 다이애나가 거대한 쥐를 삼키는 장면에서 인형이 사용된 것을 알아보기는 쉽지만, 당시로서는 TV의 어설픈 특수효과 수준을 뛰어넘어 어지간한 영화의 수준에 필적했던 것이 ‘V’였습니다. (제1부의 러닝 타임만 해도 1시간 45분으로 TV 드라마라기보다 영화에 맞먹으며, 국내 방영 당시 좌우를 자르고 4:3으로 방영되었지만 원래 화면비 또한 4:3이 아니라 16:9입니다. dvd에는 16:9의 화면비가 재현되어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식량으로 삼는다는 설정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1부만 시청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입니다. 외계인들이 UN 사무총장을 비롯한 지구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개조’한다는 설정도 밝혀졌습니다. 극중에서 UN 사무총장은 스페인인이며, 미국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는데, 25년이 지나 UN 사무총장은 한국인, 미국 대통령은 흑인이 될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11월 3일부터 방영되는 리메이크에서는 어떻게든 UN 사무총장과 미국 대통령이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이 어떤 캐릭터로 등장해 외계인들에게 이용당할지 주목됩니다.

제1부에서는 인류학자 로버트 집안에 서서히 숨통이 조여 옵니다. 철없는 큰딸 로빈은 더욱 철딱서니 없는 다니엘의 심기를 건드리며 위기를 자초합니다. 탐욕스럽고 속물스런 엘리노어의 남편 아서의 공장에서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처음 등장하는 마틴은 대사가 없었지만, 이내 마이크와 수송선을 함께 탑승해 마이크의 아들 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로버트 부부에 의해 ‘수줍음이 많다’고 언급되며 첫 등장한 바바라 역시 대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의사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남자친구와 별거를 선택한 줄리엣은, 외계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무모하게도 크리스틴의 집을 찾아갔다 심야의 활극을 벌이는 마이크를 목격합니다. 뜨거운 연인이자 신뢰하는 동지로 발전하는 두 주인공은 아직 변변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습니다. 전 여자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새로운 연인에게 첫 선을 보인 마이크는, 다이애나까지 포함하면 복잡한 4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셈입니다.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리뷰를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