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개봉 당시 ‘터미네이터’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초등학생 신분으로는 도저히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조차 ‘끝내주게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재개봉관과 불법 복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관람한 녀석들의 수다였던 것입니다. 영화 속 터미네이터가 어떻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어떻게 ‘종결’되었는지 떠들어댔습니다. 스포일러의 개념조차 없던 시대라서 마냥 재미있게 들었고, 결국 KBS-TV를 통해 방영된 더빙판으로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몇몇 잔혹한 장면들과 유일한 러브신이 삭제되었고, 결말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푹 빠져서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두고두고 반복 재생했습니다. 당시 터미네이터의 성우로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전문 성우였던 이정구(흥미로운 것은 1980년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함께 근육질 스타의 쌍두마차였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성우도 항상 이정구였습니다.)였고, 카일 리스(마이클 빈 분)의 성우로는 김도현,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분)의 성우는 손정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려 25년 전의 액션 영화가 지금도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그 생명력이 끊길 듯 하면서도 네 번째 속편으로 프랜차이즈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터미네이터’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최근에는 화려한 특수 효과와 큰 스케일의 물량 공세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제작비가 액션 영화의 필수 요소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애당초 B급 영화에서 출발한 ‘터미네이터’는 이런 요소들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걸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25년이 지나 CG가 범람하는 액션 영화들에 길들여져 있어도,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터미네이터’의 추격전은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솜씨 좋은 요리사라면 흔히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재료로도 맛깔스런 음식을 만들지만, 어설픈 요리사라면 아무리 귀하고 비싼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해도 맛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터미네이터’의 또 다른 장점은 다채로운 장르적 특성들이 혼재되어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SF, 호러, 고어, 스릴러, 느와르(세 주인공이 처음 한 자리에 모이는 공간적 배경인 술집의 이름이 ‘TECHNOIR’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결점의 킬러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 주인공이라는 내러티브는 느와르의 전형입니다.), 로맨스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영화 몇 편은 나올 법한 요소들이 매끄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 연관성, 인간과 기계의 대결, 성처녀의 구세주 잉태와 종말론 등 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요소들마저 포함하고 있습니다. ‘터미네이터’가 깔아둔 몇 개의 설정과 3개의 ‘미래 회상’(!) 장면 덕분에 시리즈는 사반세기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미래에서 현재로 온 로봇이라는 설정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어서 표절 논란에 휩싸였고, 제작비와 기술의 한계로 합성한 티가 완연한 특수 효과 장면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어설픈 것이 사실입니다.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터무니없이 진지한, 형편없는 연기력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도 우스꽝스럽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오락 거리 중 짧은 시간의 쾌락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어 제작되는 영화라는 매개물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물량 공세가 이루어지는 액션 영화에서, 적은 제작비와 치밀한 시나리오에 힘입어 ‘터미네이터’와 같은 걸작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터미네이터2 - 액션이 아니라 인간미
터미네이터3 - 어이 없는 운명론과 아날로그 액션의 부조화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 크리스찬 베일도 터미네이터를 구할 수 없었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