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亂) - 필름으로 만난 압도적인 걸작

지난 주말부터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시작된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중 유일한 일본 영화이자 가장 러닝 타임이 긴 ‘란’을 관람했습니다. 3년 전 크라이테리언의 dvd를 구입해 작은 브라운관으로 감상한 이래, 드디어 필름으로 만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기회가 닿지 않거나 국내 정식 개봉을 거치지 않아 dvd로 먼저 접하고, 후에 운 좋게 필름으로 다시 관람할 때마다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란’을 관람하기 전부터 설렜던 이유는, 브라운관이나 패널로는 도저히 그 맛을 살릴 수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특유의 원경 롱테이크를 스크린에서만큼은 제대로 살려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기대는 어김없이 충족되었습니다. 히데토라가 불타는 성을 등지고 망연자실하여 내려오는 장면이나, 앞을 볼 수 없는 츠루마루가 폐허가 된 성터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홀로 선 마지막 장면(새가 츠루마루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과연 어떻게 촬영한 것인지 궁금합니다.)을 필름을 영사한 스크린으로 보는 것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작은 화면에서는 뚜렷이 확인할 수 없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도 보다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것 또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관객과의 대화’도 없는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아트 시네마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로 붐볐습니다.

1000 여 명의 엑스트라와 50 여 필의 말을 동원한 ‘란’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전투 장면을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 또한 행운이었습니다. 무수한 군인들뿐만 아니라 전쟁과는 무관한 여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동반한 쾌감’을 제공합니다. (중반부 전투 장면에서 절단된 자신의 팔을 들고 있는 병사의 모습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오마쥬한 바 있습니다.) 관객이 느끼는 이 같은 쾌감은 권력에 집착하는 극중 등장인물들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기에 기묘하고 당혹스러운 감정을 수반합니다. 큰 아들 타로와 둘째 아들 지로, 그리고 타로의 아내였던 카에데 모두 권력을 탐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다 그 자신도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특히 대부분의 인물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며 조종하는 카에데는 권력 못지않게 섹스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카에데의 복수심은 자신의 부모를 죽은 히데토라와 그 집안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카에데와 마찬가지로 부모를 히데토라에게 죽임을 당한 둘째 며느리 스에는 증오심이나 권력욕을 찾을 수 없기에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파국은 사실 카에데가 음모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복욕을 주체하지 못한 히데토라가 지난 시절 쌓아온 업보에서 비롯된 귀결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불교적입니다. 따라서 원한을 버린 가장 긍정적인 인물인 스에가 히데토라와 나누는 대사와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부처의 얼굴은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데, 불교의 교리 중 자비보다는 업보에 가까운 것이 ‘란’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이미 히데토라의 세 아들이 깃발과 색상으로 구분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니 타로의 진바오리에는 태양이, 지로의 것에는 초승달이, 사부로의 것에는 반달이 새겨져 있는데, 지로와 사부로의 상징이 뒤바뀐 것은 마치 두 아들 간 전투의 승패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사부로의 든든한 후원자 후지마키 군은 깃발에 순결한 흰색을, 히데토라 집안의 영지를 넘보는 아야베 군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색을 사용하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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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제 | 2009/02/05 09:05 | 영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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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orges at 2009/02/05 15:36
란 컴터로 봤던거 같은데 필름이랑 차이가 많은가요;???
Commented by MessageOnly at 2009/02/05 20:10
스크린으로 보셨다는 걸 그렇게 말씀하신거 같은데요..
Commented by dcdc at 2009/02/13 00:04
오늘 보고 왔답니다. 스크린의 웅장함으로 첫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다행스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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