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관중의 원작 ‘삼국지연의’과 비교하면, ‘후편’에서는 철저히 조조(장풍의 분)와 주유(양조위 분)의 대결로 압축됩니다. 끝 모를 야심을 지닌 조조와 동오를 지키고자 하는 주유의 대립에 소교(린즈링 분)까지 끼어들어 명백한 삼각관계의 대립각을 세웁니다. 주유는 손권(장첸 분)으로부터 오군의 전권을 위임받아 휘두르기 때문에, 유비군마저도 휘하에 두고 부리는 것처럼 전반부에서 다뤄집니다.
‘전편’의 리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의 두 주인공처럼 주유와 제갈량(금성무 분)이 교감을 하면서도 경쟁하는 관계는, ‘후편’에서는 그나마 제갈량이 활약하는 전반부까지가 전부입니다. 제갈량은 신묘한 힘으로 기도를 통해 동남풍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상 예보자의 수준에 머무르며, 막상 본격적 전투에 돌입한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는 거의 비중 없는 등장인물로 전락합니다. 제갈량의 비중이 대폭 축소된 것은 원작 소설의 수전에 패한 조조군의 퇴로를 유비군이 차단하는 분량마저 영화에서는 말끔히 사라졌기 때문인데, 따라서 조조와 관우의 화용도에서의 재회 등은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 조운의 비중은 ‘전편’보다 비할 바 없이 축소되어 거의 무의미한 조연으로 밀려났습니다. 오의 노장 황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고육계는 언급만 한 번 이루어질 뿐, 실행되지 않습니다. 원작 소설과 생사 여부가 달라지는 등장인물도 있습니다.
대신 ‘삼국지연의’에서는 미미했던 손상향(조미)과 소교의 비중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손상향은 적진에 침투해 첩자 역할을 하면서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방통의 역할을 대신하며, 가공의 인물 손숙재와 나름의 우정을 쌓고(따라서 유비와는 로맨스는커녕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습니다.), 소교는 홀로 중대한 전황을 좌우하는데, 원작 소설의 적벽대전 부분에서 여성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미미했던 점을 보완하기 위한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편’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원작의 재현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과 사건만 빌려와 재해석을 하더라도 나름대로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흥미롭다면 무방했을 텐데,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고 지루합니다. 141분의 러닝 타임 중 90여분은 별다른 전투 장면도 없이 충성과 의리를 강조하는 장면들로 나열됩니다. ‘전편’의 마지막 장면을 이어받은 축구 장면은 아무리 손상향과 손숙재의 관계를 위한 복선이라 해도 지나치게 길며, 주유의 검무 장면은 쓸 데 없습니다.
종반 50분의 전투 장면이 중반부까지의 지루함을 상쇄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일개 야심가의 야망으로 인해 전장에서 죽어가는 수십만의 군인들을 잔혹하게 묘사하며 처절한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기 위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지만, 깊이를 찾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전 장면도 원작 소설의 팬이라면 빈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짤막합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동원한 엄청난 물량은 이제는 중국 영화에서 클리셰가 되어 버렸기에 도리어 지루함을 배가시킬 뿐입니다. 감흥 없는 소모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질극 장면은 ‘삼국지연의’의 영웅들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먼 찌질함과 오우삼 표 감상적인 아크로바틱 액션의 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말에서 언급되는 ‘승자 없는 전쟁’이라는 대사는 ‘삼국지연의’의 영화화에 실패한 오우삼을 위한 것이며, 오우삼이 273분에 걸친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증명한 것이 있다면, ‘삼국지연의’의 영화화란 지난한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덧붙이자면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귀족들에게 21세기 대한민국의 비속어, ‘쏠려’, ‘훈남’ 등을 입에 올리도록 만든 자막 번역가 홍주희의 ‘후편’에서의 자막은 여전히 거슬립니다. 서기 208년의 중국인 입에서 ‘골인’이라는 영어가 튀어나도록 번역하는 감각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과 이름으로만 표기되는데, 유독 조운은 자를 따와 ‘조자룡’으로 번역하는 ‘전편’의 고집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위나라 장수의 이름을 ‘하 장군’으로 번역했는데 이 또한 ‘하후 장군’ 혹은 ‘허 장군’의 오류로 보입니다. 평소 영어권 영화들을 전문 번역하던 홍주희 번역가의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의문인데, 아마도 중국어 대본을 영어를 번역한 것을 다시 한글로 옮기는 중역의 과정에서 빚은 잘못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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