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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탈출 - 주제 선택부터 실패한 리메이크 영화

서기 2029년 미 공군의 우주 정거장에서 침팬지를 탑승시켜 발사한 우주선이 실종되자, 우주 비행사 레오(마크 월버그 분)는 그 뒤를 추적합니다. 차원의 이동을 통해 미래에 도달한 레오는 유인원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행성에 불시착합니다.

1968년 작인 SF 영화의 걸작 ‘혹성 탈출’을 리메이크한 팀 버튼의 동명의 2001년 작은, 단순히 리메이크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재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리지널이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공멸의 위기를 비판하는 것이 가장 큰 주제였다면, 핵전쟁의 공포가 사라진 현 시점에 제작된 팀 버튼의 리메이크는 인종 차별을 비판하고 화합을 부각시킵니다. (심지어 유인원들도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분장했으며, 배우들의 인종이 유인원으로 분장했을 때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인간에게 언어가 없어 유인원에 비해 열등함이 강조되었다면, 리메이크는 유인원에 비해 완력과 문명이 다소 뒤떨어질 뿐, 인간 역시 언어를 가지고 유인원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30년의 격차가 벌어진 만큼, CG와 와이어 액션, 다양한 분장과 의상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주제를 선택해 비교적 큰 스케일로 리메이크를 한 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팀 버튼의 ‘혹성 탈출’은 별 다른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리메이크가 선택한 주제인 종을 뛰어넘는 화합이라는 주제는 마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단어처럼 구태의연하기 때문입니다. 현 시점에서 인종 간의 화합이라는 주제가, 오리지널이 설파했던 1960년대 당시의 핵전쟁의 공포보다 더욱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인류 공통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기에, 리메이크는 처음부터 김빠진 방향을 설정하고 출발한 셈입니다. 따라서 자유의 여신상을 등장시켜 강렬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은 오리지널의 처절한 엔딩과 달리,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리메이크의 엔딩은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지며 팀 버튼의 장난기만 엿보일 뿐입니다.

오리지널에 비해 팀 버튼만의 블랙 유머가 강화된 점을 감안하면, 차라리 리메이크는 철저한 코미디를 선택해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리메이크가 오리지널에 비해 시나리오 상으로 돋보이는 거의 유일한 장점은 인간에 호의적인 암컷 유인원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 분), 육감적인 금발 미녀 다에나(에스텔라 워렌 분)와 레오를 둘러싼 삼각관계인데, 이를 더욱 발전시켜 레오와 아리 사이에서 인간과 유인원의 잡종이 탄생하고, 이것이 ‘말하는’ 유인원의 시조가 되었다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종을 뛰어 넘는 치정 섹스 코미디’였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섹스는 헐리우드에서 금기시되는 소재이지만, 기왕 유인원에게 지능과 언어 구사 능력을 부여해 인간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려놓았으니, B급 영화의 정서를 주류 영화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팀 버튼이라면 도전해볼만한 소재가 아니었을까요.

혹성 탈출 2 - 지하 도시의 음모
혹성 탈출 3 - 제3의 인류
혹성 탈출 4 - 노예들의 반란
혹성 탈출 5 - 최후의 생존자

비틀쥬스 - 팀 버튼 월드의 소박한 시식 코너
배트맨 2 - 진짜 주인공은 주체적인 그녀, 캣우먼
빅 피쉬 -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팀 버튼의 항변
찰리와 초콜릿 공장 - 여전히 기괴하면서도 유쾌한 팀 버튼 월드
유령 신부 - 심리 묘사가 돋보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스위니 토드 - 잔혹한 고어와 치정 뮤지컬의 오묘한 만남


덧글

  • 듀얼콜렉터 2009/01/13 19:16 #

    북미에서 개봉전만 해도 기대를 모았다가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치에 못 미쳤던게 기억이 나는군요.
  • 잠본이 2009/01/13 21:44 #

    최근에는 '어이가 멈추는 날(가명)'이 이놈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는 듯 합니다 (...)
  • 이준님 2009/01/14 08:55 #

    1. 원작의 거대함에 감독의 역량이 따르지 못한 것이 주 이유입니다.(저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그렇게 봅니다만)

    2. 재미있는 건 피에르 불-콰이강의 다리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만-의 원작 결말은 팀버튼의 결말과 같습니다. 다만 원작에는 60년대작의 깊은 철학-다른 의미에서는 있지만-과 이번판의 개그가 없지요
  • 잠본이 2011/08/19 12:50 #

    '진화의 시작'에 편승해서인지 최근 원작의 번역판이 나왔습니다. 우와 영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쩌는 작품이더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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