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 베어스 시절 대전을 홈으로 사용하며 원년 우승을 차지한 두산은 원년부터 포수 자원이 풍부한 팀이었습니다. 현 두산의 김경문 감독과 기아의 조범현 감독은 모두 원년부터 OB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주전 경쟁을 벌인, 인사이드 워크가 돋보였던 명포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명포수는 OB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타 팀으로 트레이드되는 운명을 맞이하는데, 김경문은 1989년 태평양으로, 조범현은 1990년 삼성으로 이적해 각각 그 팀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비슷한 시기에 OB에는 훌륭한 포수 자원이 대거 입단합니다. 1994년 휘문고를 졸업한 공격형 포수 이도형이 입단했고, 1996년에는 원광대를 졸업한 최기문이 합류했으며, 1997년 고려대 출신 국가대표 주전 포수였던 진갑용이 2차 1지명으로, OB에서 두산으로 모기업 명칭이 변경된 1999년에는 경희대를 졸업한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홍성흔이 1차 지명으로 입단했습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출중한 포수 자원이 범람해 가히 포수 왕국이라 할 만했던 두산은 타 팀의 부러움을 샀지만, 경기 내내 어지간하면 교체 없이 한 명의 선수만 출전하는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치열한 주전 경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 말리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 포수가 타 팀으로 트레이드 되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네 명의 포수 중 가장 먼저 타 팀으로 이적된 것은 최기문이었습니다. 1998년 최기문은 좌투수가 필요했던 OB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며 롯데 차명주와 유니폼을 바꿔 입었습니다. 2000년부터 최기문은 롯데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2006년 이후부터는 고졸 포수 강민호에 밀렸고, 최근에는 스위치 히터의 장점을 살려 주로 대타로 출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두산 유니폼을 벗은 것은 의외로 진갑용이었습니다. 아마 시절부터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대형 포수라는 극찬의 주인공이었던 진갑용은 1999년 입단한 신인 홍성흔에 밀리며 그해 7월 31일 투수 이상훈에 4억을 얹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진갑용은 삼성 이적 이후, 물을 만난 고기처럼 FA로 LG에서 영입된 김동수와의 주전 경쟁에서 승리하며, 두산 시절보다 향상된 플레이를 선보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포수로 자리 잡았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장타자로서의 타격 능력에 비해 인사이드 워크가 떨어지는 이도형 역시 두산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2002년 한화의 포수 강인권과 맞트레이드된 이도형은 최근에는 마스크를 쓰는 일이 거의 없이 지명타자 요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김태균, 김태완 등 젊은 우타자 요원들이 풍부하기에 주전으로 출전하는 일은 드뭅니다.
이처럼 선배들과의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홍성흔은 잘 생긴 외모와 시원시원한 플레이, 호쾌한 제스처로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2008 시즌을 앞두고 홍성흔을 포수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세운 김경문 감독과 마찰을 빚어 개막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고, 채상병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고 구단의 포수 은퇴식까지 거치며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됩니다. 시즌 타율 0.332로 팀 동료 김현수에 이어 타격 2위를 차지한 홍성흔은 시즌 종료 후 두산 팬들의 기대와 달리 롯데로 FA 이적을 하며 10년 동안 입었던 정든 두산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적자생존의 ‘포수 전쟁’의 승자 홍성흔 역시 두산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비운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산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달리 사실상 억지로 벗게 된 포수 마스크를, 롯데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채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두산에 현재 남은 포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타 팀에서 영입된 선수들입니다. 현재 두산의 주전 포수 채상병은 2002년 두산의 FA 정수근을 롯데가 영입하는 과정에서의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에서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백업 포수는 채상병의 연세대 2년 선배로 LG와의 2:2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된 최승환입니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공수 양면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SK와의 한국 시리즈에서 걸출한 상대 포수 박경완에 밀렸던 점을 감안하면, 상무에서 복귀하는 용덕한이 가세하지만, 내년에도 두산의 포수 문제는 난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포수가 넘쳐나 행복한 고민을 했던 두산의 1990년대를 생각하면 ‘격세지감’과 ‘얄궂은 운명’이라는 두 단어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비슷한 시기에 OB에는 훌륭한 포수 자원이 대거 입단합니다. 1994년 휘문고를 졸업한 공격형 포수 이도형이 입단했고, 1996년에는 원광대를 졸업한 최기문이 합류했으며, 1997년 고려대 출신 국가대표 주전 포수였던 진갑용이 2차 1지명으로, OB에서 두산으로 모기업 명칭이 변경된 1999년에는 경희대를 졸업한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홍성흔이 1차 지명으로 입단했습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출중한 포수 자원이 범람해 가히 포수 왕국이라 할 만했던 두산은 타 팀의 부러움을 샀지만, 경기 내내 어지간하면 교체 없이 한 명의 선수만 출전하는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치열한 주전 경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 말리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 포수가 타 팀으로 트레이드 되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네 명의 포수 중 가장 먼저 타 팀으로 이적된 것은 최기문이었습니다. 1998년 최기문은 좌투수가 필요했던 OB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며 롯데 차명주와 유니폼을 바꿔 입었습니다. 2000년부터 최기문은 롯데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2006년 이후부터는 고졸 포수 강민호에 밀렸고, 최근에는 스위치 히터의 장점을 살려 주로 대타로 출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두산 유니폼을 벗은 것은 의외로 진갑용이었습니다. 아마 시절부터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대형 포수라는 극찬의 주인공이었던 진갑용은 1999년 입단한 신인 홍성흔에 밀리며 그해 7월 31일 투수 이상훈에 4억을 얹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진갑용은 삼성 이적 이후, 물을 만난 고기처럼 FA로 LG에서 영입된 김동수와의 주전 경쟁에서 승리하며, 두산 시절보다 향상된 플레이를 선보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포수로 자리 잡았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장타자로서의 타격 능력에 비해 인사이드 워크가 떨어지는 이도형 역시 두산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2002년 한화의 포수 강인권과 맞트레이드된 이도형은 최근에는 마스크를 쓰는 일이 거의 없이 지명타자 요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김태균, 김태완 등 젊은 우타자 요원들이 풍부하기에 주전으로 출전하는 일은 드뭅니다.
이처럼 선배들과의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홍성흔은 잘 생긴 외모와 시원시원한 플레이, 호쾌한 제스처로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2008 시즌을 앞두고 홍성흔을 포수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세운 김경문 감독과 마찰을 빚어 개막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고, 채상병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고 구단의 포수 은퇴식까지 거치며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됩니다. 시즌 타율 0.332로 팀 동료 김현수에 이어 타격 2위를 차지한 홍성흔은 시즌 종료 후 두산 팬들의 기대와 달리 롯데로 FA 이적을 하며 10년 동안 입었던 정든 두산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적자생존의 ‘포수 전쟁’의 승자 홍성흔 역시 두산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비운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산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달리 사실상 억지로 벗게 된 포수 마스크를, 롯데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채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두산에 현재 남은 포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타 팀에서 영입된 선수들입니다. 현재 두산의 주전 포수 채상병은 2002년 두산의 FA 정수근을 롯데가 영입하는 과정에서의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에서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백업 포수는 채상병의 연세대 2년 선배로 LG와의 2:2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된 최승환입니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공수 양면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SK와의 한국 시리즈에서 걸출한 상대 포수 박경완에 밀렸던 점을 감안하면, 상무에서 복귀하는 용덕한이 가세하지만, 내년에도 두산의 포수 문제는 난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포수가 넘쳐나 행복한 고민을 했던 두산의 1990년대를 생각하면 ‘격세지감’과 ‘얄궂은 운명’이라는 두 단어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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