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은 한국 영화계의 유례없는 불황을 타개할 적임자로 인식되었습니다. 170억의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어 거대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1,000만 관객 동원 가능 여부가 설왕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면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은 어려워 보입니다. 과거 1,0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던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괴물’, ‘왕의 남자’ 등은 한국적 비극의 정서를 오락성과 결부시켜 성공한 사례인데, ‘놈놈놈’은 한국적 정서보다는 무국적성과 세계시민주의로 승부하기 때문입니다. ‘놈놈놈’은 일제 강점기의 만주를 배경으로 하며 일본군도 등장하지만, 일본군과 친일파를 응징하는 것은 주된 서사구조와 무관하며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정서는 찾을 수 없고, 경쾌할 뿐입니다. 이는 일본 수출을 감안한 것일 수도 있으나, 애초 김지운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들이 한국적 정서보다는 무국적성과 B급 취향에 가까웠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게다가 한국 영화의 주소비층인 20대는 서부영화에 대한 향수가 없는데, ‘놈놈놈’은 과거 30대 이상이 TV와 동시 개봉관 등을 통해 접했던 스파게티 웨스턴의 향수에 호소합니다. 과거 웨스턴의 장르적 특성에 친숙한 나이든 세대에게는 ‘놈놈놈’의 3인 결투를 비롯한 상당수의 장면과 설정이 친숙한 것이며, 연출에 들인 공을 이해할 수 있지만, 20대에게는 그저 정신없는 총격전만 난무하는 액션 영화로 수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놈놈놈’의 입소문은 ‘달콤한 인생’의 개봉 당시처럼 ‘생각보다 싱겁다’, ‘기대에 못 미친다’가 주류를 이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놈놈놈’의 내러티브 또한 허점이 눈에 띕니다. 영화 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지만 차라리 ‘나쁜 놈 대 이상한 놈’이 어울립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송강호는 영화의 중심을 잡으며 끊임없이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며, 이병헌은 몸까지 근육질로 만들어 작심하고 자신의 첫 번째 악역을 영화의 비주얼과 맞아 떨어지도록 과장스럽게 연기합니다. 영화 속 시간적 배경 이전부터 태구와 창이는 얽혀 있었기 때문에, 창이가 태구에 집착하는 것은 설득력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나쁜 짓도 하지 않고, 이상한 짓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놈’으로 규정된 도원은, 밋밋한 인물이며 다른 두 사람과의 대립 구도가 선명하지 않아 겉돕니다. 초반부 기차 장면에서 도원은 창이와 인상적인 맞대결을 펼치지만, 종반의 3인 대결 전까지는 시종일관 어정쩡한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도원은 라이플을 들고 마을 지붕을 넘나들며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멋들어진 명사수이지만, 왜 도원이 현상금 사냥꾼이 되었는지, 독립군과는 어떤 관계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태구는 도원에게 ‘냉정하다’고 평가하지만, 관객은 도원이 냉정한 캐릭터인지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장면을 제시받지 못합니다. 원래 출신이 도박꾼이라는 도원의 배경 설명은 상당 부분 삭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놈놈놈’의 dvd는 삭제 장면을 보강하여 러닝 타임에 구애받지 않는 디렉터스 컷으로 발매되지 않을까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우성의 연기력이 처지기 때문이 아니며, 시나리오나 편집상의 실패로 봐야 합니다. 김지운 감독은 자신의 전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송강호와 이병헌은 신뢰했지만, 자신의 작품에 처음 출연하는 정우성은 신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의 대립 구도를 오마쥬했지만 안타깝게도 영혼만큼은 오마쥬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에 대한 열망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사악한 인간의 본성을 노출시키는 ‘석양의 무법자’와 같은 통찰력이 ‘놈놈놈’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달콤한 인생’에서 사소한 감정의 흔들림 때문에 자신과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며 나름의 깊이를 과시하던 김지운 감독이었지만 ‘놈놈놈’에서는 철학적, 정신적 깊이를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170억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뽑을 수 있는 흥행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병헌의 열성 팬이 있는 일본 흥행을 통해 만회를 예상할 수도 있지만, 얼굴에 흉터를 분장하고, 귀에 피어싱을 하며, 광기를 마구 내뿜는 이병헌의 악역 연기에 일본의 중년 여성 팬들이 열광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객관적이며 차가운 시선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주관적이며 뜨거운 시선으로 보자면, 한 마디로 놀랍고 대담무쌍한 오락 영화입니다. ‘달콤한 인생’을 접했을 때, 한국에서도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연출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사실에 경탄했고, 이후에도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 느와르는 없었는데, ‘놈놈놈’을 보고 난 후의 감상 또한 비슷합니다. 김지운 감독은 과거의 만주 웨스턴의 핏줄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과거 조악한 만주 웨스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스케일이 크고 때깔이 좋으며 매끈합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웨스턴을 찍을 수 있는 것은 김지운 감독 뿐이며, 이후에도 웨스턴을 시도할 한국 영화 감독은 없어 보입니다.
쉴 새 없이 화면을 채우는 총격전 장면은 과거 웨스턴의 전성기 영화 대여섯 편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화려하며 역동적입니다. 초반부 기차 장면의 스케일과 장면 구성은 압도적이며, ‘킬 빌 Vol. 1’에서도 사용된 산타 에스메랄다의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를 배경 음악으로 정우성이 말을 탄 채 라이플을 연사하는 장면은 아시아 영화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박력을 구현합니다. ‘석양의 무법자’의 오마쥬인 3인 결투조차 원전처럼 단 한 방의 총격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엔드 크레딧에서는 마치 성룡의 영화처럼 촬영 장면 스틸이 제공되어 그간의 고생을 증명하는데, 결코 소위 ‘자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 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시각적 쾌감만을 따지자면 역대 그 어떤 한국 영화에 비해 화려하며 독특한 ‘놈놈놈’이, 흥행 실패라는 멍에를 쓰고 참신하고 대담한 시도조차 부정당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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