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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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Report 프로야구 필자, 전 스포츠조선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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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사무라이 - 시민 계급의 등장 영화

라쇼몽 - 변덕과 욕망, 허위와 거짓
이키루 - 관료주의 vs 시한부 인생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맥퀸 주연의 ‘황야의 7인’을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물론 TV에서였죠. 개성이 넘치는 7명의 카우보이가 모여 농부들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단결한다는 설정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행진곡 풍의 테마 음악을 지금도 허밍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황야의 7인’은 10대 시절의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영화였습니다.

당시 ‘황야의 7인’이 실은 일본 영화 ‘7인의 사무라이’의 헐리우드판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랐습니다. 매우 전형적인 서부극이며 미국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던 ‘황야의 7인’이 ‘왜색’ 넘치는 사무라의 영화의 리메이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10대인 저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죠.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 10대 소년이 일본 영화를 한국에서 구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용산이나 테크노마트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CD에 불법 복제해 팔던 것이 1990년대 후반의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divx 같은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죠.

IMF 직전이었던 1990년대 중반 우리 나라에서는 예술 영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숭 시네마텍에서 백두대간이 수입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노스탤지어’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화니와 알렉산더’,(5시간짜리 무삭제판이 이번에 크라이테리언으로 발매되던데 기대 만빵입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 등 흥행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이었지만 당시의 제 또래의 영화 키드들은 꾸준히 극장을 찾았습니다. 이때 각 대학의 영화 소모임에서는 소위 ‘컬트 무비’를 앞다투어 상영했고 대학교 앞에 처음 생기기 시작한 비디오방에서는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은 일본이나 제3세계의 영화들까지 복제해 구비하기 시작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를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대앞의 비디오방에서 친구(사내 녀석이었습니다. 오해 없으시길.)와 함께 벼르고 별러서 보게 된 것이었죠. 3시간 26분에 달하는 긴 러닝 타임에 한글 자막이 없이 영어 자막으로 봐야 했던 만큼 ‘별러야’ 볼 수 있었습니다. 초가을의 냉랭한 비디오방에서 움츠린 채 보았던 ‘7인의 사무라이’는 예상과 너무 다른 영화였습니다. 경쾌한 분위기의 ‘황야의 7인’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던 것이죠. 눈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무라이들의 폼재는 액션 영화라고 예상했던 것은 억측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8년여가 지난 뒤 다소 조악한 한글 자막이지만 dvd로 감상하게 된 ‘7인의 사무라이’는 우연히 사귄 속 깊은 친구와 재회한 듯한 느낌입니다.

16세기 중반 전국 시대, 산적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사무라이들을 고용하여 산적을 막고자 합니다. 이에 고용된 사무라이는 현명하고 노련한 캄베이(시무라 다카시 분), 여유 있는 성격의 고로베이, 유머 감각이 풍부한 헤이하치, 과묵하지만 예리하며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큐조, 캄베이의 부하였으며 축조술에 뛰어난 시치로지, 풋내기지만 의욕이 넘치는 가츠시로, 농민 출신의 천박한 듯한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 분)의 7명입니다.

7명의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을 믿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선입견을 극복하면서 그들을 훈련시켜 산적과 맞섭니다. 산적들과의 전투는 매우 사실적입니다. 몇 번 칼이 맞부딪치다가 승부가 갈리는 1:1 대결의 사무라이 액션이 아니라 ‘진짜 싸움’을 묘사하는 감독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흑백 영화에 러닝 타임이 길어서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졌다 해도 막상 ‘7인의 사무라이’를 본다면 ‘재미있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특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펼쳐지는 마을에서의 마지막 싸움은 처절할 정도로 압권입니다.

사무라이들은 검술 능력이 떨어져서 상대의 칼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일본으로 도입된 총 때문에 하나하나 희생됩니다. 봉건 시대를 풍미했던 사무라이 몰락은 과학 기술 때문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웅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울러 사무라이들이 가난한 산골 마을로 산적을 막기 위해 고용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죽음의 원인이 될 텐데 이는 명예를 중시했던 사무라이 계급이 실리를 중시하는 농민들에게 밀려 몰락했으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과학 기술을 수용해 시민 계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작품이 바로 ‘7인의 사무라이’입니다. 따라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주인공인 캄베이의 마지막 대사 ‘우리(사무라이)는 또 졌다. 이긴 것은 저들(농민)이다.’를 통해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과 농민의 시민 계급으로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영화 한 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쇼몽’에서는 나뭇꾼으로, ‘이키루’에서는 죽음을 앞둔 공무원 와타나베로 분했던 시무라 다카시의 자신감 넘치는 절도 있는 연기와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무라이가 된 기쿠치요로 분한 미후네 도시로의 복잡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연기는 영화의 두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1954년작인 ‘7인의 사무라이’에서 시무라 다카시나 미후네 도시로를 비롯한 7명의 사무라이로 분했던 배우들이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는 점은 왠지 아쉽게 느껴집니다. 개봉 50주년이 된 ‘7인의 사무라이’를 지금 일본에서 대자본을 들여서 리메이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는 쓸만한 남자 배우들이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감독이겠죠. 구로자와 아키라를 능가하기는커녕 비슷하게라도 제작할 감독을 지금 일본에서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일테니 말입니다.

덧글

  • NeOSigmA 2004/10/02 12:06 #

    알고 계실지도 모르겟지만.. 지금 일본에서 유료방송으로 'SAMURAI7'이라는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니지만 꽤나 잘 만든거 같아요. 물론 큰 시나리오와 개념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인거 같지만....
    '7인의 사무라이'를 안봐서 잘 모르겠네요. ^^
  • 위스테리아 2004/10/02 12:20 #

    디제 님의 글을 보니 그 영화가 꼭 보고 싶어지는군요. +_+;;
    링크 신고합니다.
  • 디제 2004/10/02 14:07 #

    NeOSigmA님/ '사무라이7'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 아직 찾아 보지 않았습니다.
    위스테리아님/ 네, 꼭 한번 찾아 감상해보십시오. 링크 환영합니다.
  • 알트아이젠 2004/10/02 16:20 #

    본문과는 관련은 없지만 [사무라이7]을 만든 곤조가, 이번에 [암굴왕]을 애니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 디제 2004/10/03 02:14 #

    알트아이젠님/ 곤조는 비쥬얼이나 특수효과는 화려한데 시나리오가 썰렁해서 항상 볼지말지 고민하게 되더군요.
  • 나우시카 2004/10/14 00:11 #

    저번에 케이블로 보고나서 감동했었습니다.
    특히 1급 검사와 키쿠치요가 X는 장면이 참 가슴아프더군요.
  • 아레스 2004/11/27 23:42 #

    전 트랙백이 뭔지 잘 몰랐었는데.. 멋진 리뷰 읽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훌륭한 영화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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