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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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 주유와 제갈량의 첩혈쌍웅, 혹은 132분 짜리 예고편 영화

본 포스팅에는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조(장풍의 분)의 추격에 신야를 잃었지만 백성을 지키며 후퇴한 유비(우용 분)는 제갈량(금성무 분)을 동오로 보내 손권(장첸 분)과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제갈량은 손권과 더불어 동오의 수군을 지휘하는 주유(양조위 분)를 설득하기 위해 적벽에 위치한 그의 진영을 방문합니다.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하 ‘적벽대전’)은 ‘삼국지연의’의 클라이맥스인 적벽대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배포하는 팜플렛 어디에도 ‘2부작’이나 ‘속편’을 암시하는 단어가 없지만, ‘적벽대전’이라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장대한 규모의 수전을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수전의 개전 직전까지만 묘사합니다. 수전은 내년 초에 개봉이 예정된 속편으로 떠넘깁니다. 초반부의 장판전이나 후반부의 팔괘진에서 그런대로 볼만한 전투 장면을 제시하지만 수전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미진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큰 단점입니다.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라는 부제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니, 132분 짜리 예고편을 돈 주고 보았다는 찜찜함은 흥행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합니다.

‘적벽대전’은 두 영웅 제갈량과 주유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삼국지연의’의 전반부의 주인공이 유비라면, 삼고초려 이후 등장하는 제갈량이 후반부의 주인공인 셈인데, ‘적벽대전’은 제갈량보다 주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배우의 이름값에서 양조위가 금성무보다 무게감이 있으며,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양조위의 이름이 먼저 올라갑니다. 주유가 등장하기까지는 러닝 타임의 1/3이 흘러가야 하며, 그것도 잔뜩 신비감을 조성한 후에 얼굴을 보여주지만, 제갈량은 초반부에 꾀죄죄한 얼굴로 여타 등장인물들과 함께 제시될 뿐입니다. ‘삼국지연의’의 신묘한 지혜도 거의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인재로 등장하며, 특유의 하얀 색 옷조차 누리끼리해 보일 정도로 제갈량에 관해서는 ‘거품 빼기’에 치중합니다. 대신 주유는 ‘삼국지연의’와 달리 제갈량을 질투하거나 증오하지 않으며, 심지가 굳고 신중하면서도 무에도 능한 용맹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미주랑’이라는 별명을 의식해서인지 양조위는 말끔히 면도하고 등장했지만 그다지 원작의 미남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원작만을 따지면 양조위의 주유보다 금성무의 제갈량이 훨씬 더 재현도가 높습니다.

중반부에 제갈량과 주유가 만나는 장면에서 진법을 논하고, 주유의 애마의 출산을 제갈량이 돕고, 주유와 제갈량이 거문고를 합주하고, 주유가 아내 소교(린즈링 분)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매우 장황하게 나열되었는데, 주유의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한 장면이 지나치게 많아 중반부의 흐름이 더딥니다. 차라리 전후편을 나누지 않고, 중반부를 깔끔히 압축하여 러닝 타임 3시간짜리 한 편의 영화로 적벽대전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들은 주유와 제갈량의 이심전심의 동질성을 제시하는 것인데, 두 사람의 거문고를 속주하며 겹쳐지다 클로즈업에서 화면이 멈추는 장면은 오우삼의 전작 ‘첩혈쌍웅’에서 주윤발과 이수현이 교감하며 동질화되는 정지 장면과 같습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 팔괘진에서도 두 사람은 대화 한 마디 없이 교감하며 휘하 장수들을 수족 부리듯 (마치 주윤발과 이수현이 권총과 샷건을 다루듯) 자유자재로 지휘하며 승리로 이끕니다. 오우삼은 ‘적벽대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유를 재조명하고 주유와 제갈량이 정(情)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캐스팅 과정에서 와타나베 켄으로 낙점되었다가 ‘중국의 영웅을 일본인이 연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신 조조 역을 맡은 장풍의는 노회하기는 하지만 이미지가 선량해서 카리스마나 사악함을 풍기지 못합니다. 초기 논의대로 와타나베 켄이 캐스팅되었거나 차라리 주유 역으로 물망에 올랐던 주윤발이 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종반부에서 조조가 축구를 즐기는 장면은, 인기에 비해 기량이 처지는 중국 축구에 대한 컴플렉스가 반영된 것 같아 실소를 자아내며 생뚱맞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조는 지병인 두통으로 고생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암시되는데 이것이 속편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연으로 등장한 화타가 속편에서 비중이 커질지 주목됩니다.

유비, 관우(파삼 분), 장비(장금생 분)는 원작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합니다. 유비는 여전히 짚신 짜는 것을 취미로 하는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데 최근 유비를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인 ‘음흉함’은 전혀 조명하지 않습니다. 사지를 헤치고 아두를 찾아온 조운 앞에서 아두를 내던지는 장면도 없습니다. 주유와 제갈량이 주인공이고 그 밖에 많은 무장들이 전장을 누비니 유비가 재해석되거나 조명을 받는다는 것은 러닝 타임을 감안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관우는 ‘삼국지연의’와 달리 장판전에 뛰어들어 조조의 목전에까지 단기로 압박하는데, 이는 속편에 제시될 화용도의 포석을 놓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개봉된 ‘삼국지 - 용의 부활’(이하 ‘용의 부활’)에서 적룡이 분한 관우보다 더욱 원작의 이미지에 근접한 것이 ‘적벽대전’의 관우입니다. 장비는 무골로 묘사된 ‘삼국지연의’와 달리 지략이 있고 서예를 즐기는 지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장판에서 홀로 조조군과 맞서는 장면이 없습니다. 하지만 용모는 책에서 튀어나와 스크린으로 들어온 것처럼 원작의 재현도가 뛰어납니다.

‘무간도 2’에서 황지성 국장(황추생 분)의 절친한 동료 육계창으로 분했던 호군이 연기하는 조운도 좋습니다. ‘용의 부활’에서는 주인공이었고 유덕화가 분하여 매우 화려했지만, 건실한 조운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이었는데 ‘적벽대전’의 조운은 ‘삼국지연의’의 이미지에 가까워졌습니다. 영화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다른 인물들은 모두 성과 이름으로 불리는데 조운만큼은 성과 호를 붙여 ‘조자룡’으로 꾸준히 자막에 제시된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용의 부활’을 의식해 조운을 ‘조자룡’으로 번역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홍주희 번역가가 주로 영어권 영화를 번역했으니 중국어로 더빙된 ‘적벽대전’의 자막을 맡은 것은 미심쩍습니다. 그리고 장비가 제갈량에게 ‘책사(策士)’라고 부르는 자막도 있었는데 ‘책사’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포함되었으니 장비가 제갈량의 면전에 대고 ‘책사’라고 불렀는지 의문입니다. ‘군사(軍師)’라고 번역했으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중국어 대사를 영어로 번역한 대본을 우리말로 옮긴 중역은 아닌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친절히 자막으로 보여주는 수고는 좋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번역가의 이전의 변역작들을 감안하면 찜찜함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감녕 역의 나카무라 시도우는 스테레오 타입의 연기를 하지만 해적 출신이었던 배역과 맞아 떨어집니다. 굳이 아쉬움을 지적하자면 중국어에 서툴 수밖에 없어 나카무라 시도우의 입 모양과 더빙된 대사의 싱크로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조위와 금성무의 대사 처리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손권이 가신들 앞에서 조조와의 개전을 결의하는 장면에서 상(床)의 구석만 잘라낸 장면은, 절반을 두동강냈다는 ‘삼국지연의’에 비해 박력이 떨어집니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조조가 동오를 침략한 이유가 대교와 소교(린즈링 분) 자매를 손에 넣기 위해서인데,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소교만 그리워하고 대교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색합니다. 조미가 분한 손상향은 엉뚱하고 당돌한 이미지를 잘 살려냈지만 원작에서 묘사되는 미녀와는 거리가 멉니다. 유비와 혼담이 오갔으니 촉과 오의 화합을 상징하는 유비와 손상향의 결혼으로 속편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닐까 예상해봅니다. 유약한 이미지의 노숙(후용 분)도 무난했습니다.

‘적벽대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유와 제갈량의 교감이라는 측면에서 오우삼 영화의 주제의식이 선명하지만 비둘기와 슬로모션의 사용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첩혈쌍웅’ 이후 오우삼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새하얀 비둘기는 적벽의 주유 진영에서 노닐며 오와 촉이 선(善)임을 상징합니다. 비둘기에 대한 양조위와 금성무의 대사는 능청스러운 개그입니다. ‘페이스 오프’를 제외하면 ‘미션 임파서블 2’ 등 헐리우드 진출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슬로 모션을 남발했다는 평이 주류였지만 ‘적벽대전’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제되며, 창과 창이 맞부딪치며 흙먼지가 날리고 피가 튀는 장면에서 적절히 사용됩니다. 최근 중화권 감독들의 큰 스케일의 무협 영화 제작붐이 일고 있지만 ‘적벽대전’만큼 창을 위력적이며 멋지게 표현한 영화는 없습니다. 갑옷을 입은 병사의 사지를 꿰뚫는 창의 위력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창으로 상대를 때려눕히는 연출도 우렁찬 효과음이 입혀져 박력 넘칩니다.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적벽대전’은 드라마와 ‘용의 부활’ 등 영화를 모두 포함해 실사화된 ‘삼국지연의’의 작품 중 가장 나은 작품입니다. 어설프게 퓨전 사극화하지 않고 정통 사극으로 승부하려한 점도 좋습니다. 진정한 적벽 대전을 다룰 속편에서는 장대한 스케일의 수전과 더불어 연환계와 방통의 등장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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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anaki-我行 2008/07/12 12:05 #

    자막 부분은 매우 동감합니다.

    읽다 보니 문법적으로도 이상한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습니다...ㅡㅡ;;;
    (물론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군데군데 너무 동떨어진 번역도 보이고요....
  • 하느니삽 2008/07/12 23:01 #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동오를 침략한 이유가 대교와 소교 자매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아니죠. 제갈량이 주유를 격분하게 하기 위해서 지어낸 얘기로 나옵니다.
  • shiny 2008/07/12 23:13 # 삭제

    번역이 정말 이상했음... 영화몰입에 방해가 될정도로...
  • fazzie 2008/07/12 23:56 #

    주유 캐스팅은 정말 좀 아니더군요. 진삼국무쌍 시리즈는 저리 치우더라도 주유는 외모묘사 드문 원작에서도 미남으로 나왔는데..
  • 城島勝 2008/07/13 06:38 #

    대체로 주유를 띄우고자 러닝 타임을 엄청 잡아 먹었다는 주변 평이 있던데 정말인가 보네요. 사실 전반에서 딱히 띄우지 않아도 수전 이후 후반전엔 충분히 띄울만 했는 데 기존 이미지를 바꾸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할 만 합니다. 근데 이래서는 공명 선생이 남동풍을 빈 후에 도망칠 때 묘사를 어떻게 할 지 그게 궁금합니다. 하하.
  • ..... 2008/07/13 14:16 # 삭제

    하느니삽님 말대로...소교와 대교 얘기는..조조도 이교에게 관심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제갈량이 그것을 이용하고자 조조가 지은 시를 사용해 조금 과장한 것이죠.
    사실 연의에는 소교와 대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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