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 주인공보다 관객이 더 괴롭다

스스로를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아버지(닉 놀테 분)로부터 강화 유전자를 물려받은 브루스(에릭 바나 분)는 연구 도중 감마선에 노출되어 분노하면 헐크로 변신하게 됩니다. 브루스의 연구실 동료이자 여자친구인 베티(제니퍼 코넬리 분)는 군 장성인 아버지 로스(샘 엘리엇 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로 1970년대 후반에 TV 드라마로 방영된 ‘인크레더블 헐크’의 첫 번째 영화인 2003년 작 ‘헐크’는 이안이 감독을,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을 맡아 개봉 전부터 한껏 기대를 부풀렸습니다. 하지만 관객이 슈퍼 히어로물에서 요구하는 카타르시스나 유머 감각은 찾을 수 없고, 더딘 템포에 무겁게 짓누르는 분위기로 인해 히어로의 이름값이 무색하게 흥행 참패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연출하는 작품마다 인간의 실존에 고민하는 이안 감독의 스타일이, 오락 영화로서 충실히 기능해야 하는 슈퍼 히어로물과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아무리 좋은 감독과 배우들이 만나도 시나리오가 부실하면 참혹한 결과를 야기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안 감독이 동양적인 인연으로 ‘헐크’의 인간관계를 조명하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이지만, 브루스와 베티, 양가의 인연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존하고 있으며, 두 집안의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도 평면적입니다. 브루스가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고 헐크가 되는가에 대한 의문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습니다. 히어로 스스로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으니 관객은 러닝 타임 내내 좌표를 상실한 배처럼 지루히 부유하게 됩니다. 분노가 히어로로의 변신을 이끌어내기에 주인공 브루스는 끊임없이 고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히로인인 베티가 이를 중화시켜 주지 못하고 일말의 경쾌함도 없이 느와르의 팜므 파탈처럼 행동하기에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니퍼 코넬리의 잘못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문제입니다.

변신하며 단단히 솟아오르는 근육은 슈퍼 히어로들 중에서도 지극히 성적인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외계인 혹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인 분노가 잠재된 야성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헐크’는 매우 매력적인 히어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본작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5년 만에 감독과 주연배우를 일신해서 새로운 영화가 곧 개봉된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입니다. 에드워트 노튼이 주연한 ‘인크레더블 헐크’는 보다 가볍고 경쾌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와호장룡 - 무협물의 절정, 그리고 끝
브로크백 마운틴 - 떠난 자는 남고, 남은 자는 떠나고
색, 계 - 남자와 사랑에 이용당해 파괴되는 여자

by 디제 | 2008/06/10 11:49 | 영화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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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8/06/10 20:59

제목 : MARVEL MOVIES - 헐크 (재탕)
※영화감상 [2003년 7월 6일 작성] -미국 코믹스에서 주로 사용하는 글씨체로 크레딧이 나온다거나,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여러개의 컷으로 분할하여 숨가쁘게 바꿔가면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화면구성이나, 그리고 말풍선과 컷으로 구획된 사상 유례없는 스타일의 엔딩 화면까지... '난 만화니까 심각하게 보지 말아주쇼'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국 코믹스 스타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겐 별로 의미가 없을 테지만...) ......more

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8/06/10 21:04

제목 : 녹색남의 이번 나들이는 특히나 부담스럽다
(C) Marvel / Universal 1. 5년 먼저 극장에 걸렸던 이안 감독판 <헐크>의 미묘한 성과 아시다시피 우리들의 감마선 녹색덩치 헐크가 은막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에 <와호장룡>으로 유명한 이안(물건너 표기는 '앙 리') 감독이 연출한 극장판 <헐크> 쪽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그다지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관객들의......more

Commented by 알트아이젠 at 2008/06/10 11:57
그래도 만화가 생각나는 컷분할연출은 꽤나 볼만했습니다. ^^;;
Commented by ZAKURER™ at 2008/06/10 16:44
만화가 생각나는 컷 분할이라기 보다는 당시 이슈몰이하던 24Hours 따라하기 아니었던가요?
다들 보면서 정신없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Commented by anaki-我行 at 2008/06/10 16:47
저도 컷분할 연출은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8/06/10 17:18
컷분할 연출을 뺀다면 정말 헐크라는 제목 달았던 작품으로선 괴작이었습니다
잠본이님께서 이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해주셨죠. '마징가를 바라는 관객에게 에반게리온을 내놨다'

더 해괴한건 VHS판이 16:9라서 4:3 TV를 쓰는 저희 집에선 보다가 시력 떨어질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는것...
Commented by 이악물기 at 2008/06/10 17:38
맞아요, 맞아. 바른 지적입니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6/10 21:11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 중에 '날 화나게 하지 마라~'라고 외치는 사람이 꽤 많았다는 전설이...(믿는 사람 로스장군)
Commented by 프레디 at 2008/06/10 23:08
썩 괜찮게 본 영화였습니다. 만화의 경쾌함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안의 영화를 보러 간 사람들에게는 그랬다는 거지요. 초록색 괴물이 나오는 만화를 그정도의 그리스 비극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에는 참 놀랐습니다.
Commented by 일레갈 at 2008/06/10 23:16
헐크에서 성적 은유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캐릭터 자체는 뼛속까지 근육마초지만 가장 이질적인 초록 피부에 본능적인 분노로만 움직이는 겉모습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고, 결정적으로 작중에서도 거의 고자에 가까우니까요(...)
Commented by oIHLo at 2008/06/11 01:40
그럭저럭 괜찮게 봤습니다만 거의 머리속에서는 잊혀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기억나는 장면이 있더군요. 부자의 대결이 끝나고 아버지는 죽는데 갑자기 플래시백으로 "잘 자라"하면서 아이의 머리에 키스를 해주던 장면...
왜인지는 모릅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8/06/11 11:29
알트아이젠님, ZAKURER™님, anaki-我行님/ 드라마 '24'나 만화적인 컷분할이기도 하지만 저는 뜬금없이 토미노식 컷 분할이 생각나더군요. --;;;
제목없음님/ 기존의 헐크팬들에게는 악몽과 같았을 겁니다.
잠본이님/ '보는 이를 헐크로 만들었다'는 평도 본 기억이 납니다.
프레디님/ 그래도 이안 감독의 영화가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가장 재미있어야 할 슈퍼 히어로물로 가장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합니다.
일레갈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분노하여 딱딱하게 솟아오르는 헐크의 몸은 발기된 페니스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oIHLo님/ 그 부자 대결도 '응? 뭐가 어쨌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아보기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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