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루 - 관료주의 vs 시한부 인생

라쇼몽 - 변덕과 욕망, 허위와 거짓

시청의 시민과(우리말로 번역하면 ‘민원실’ 쯤일 것 같습니다.)의 과장 와타나베(시무라 다카시 분)는 위암을 선고받지만 연금에만 관심이 있는 외동아들 미츠오 부부나 관료주의에 물든 부하직원들에게 병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소설가와 만나 밤새 유흥가를 전전하지만 결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여직원 토요와 만나 생기발랄함과 삶에 대한 의욕에 부러워하다 공무원으로서의 자신의 일에 의미를 찾아내고 매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와타나베의 장례식으로 급반전되고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와타나베의 삶에 대해 회고합니다. 관료주의와 힘겹게 맞섰던 시한부 인생의 노년 사내의 노력에 대해 말입니다. 1950년작 ‘라쇼몽’에서 이미 구로자와 아키라 본인이 써먹었으며 오손 웰스의 걸작 ‘시민 케인’에서도 사용되었던 주변 인물들의 과거 회상 기법을 다시 한번 사용합니다. 공원을 설립해주는데 앞장선 와타나베를 기리는 부녀자들이 다녀가자 자신의 공이라고 내세우던 부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숙연해지기 시작합니다. 끝으로 경찰이 들어와 와타나베가 생전에 새로 구입한 하얀색 모자를 가지고 들어와 공원에서 죽기 직전 ‘삶은 찰나의 것’이라며 노래를 불렀다고 회고하자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관료주의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었다며 앞으로는 와타나베가 생전에 그랬듯 열심히 일하겠다며 각오를 다집니다. 와타나베의 외동아들 미츠오는 아내에게 아버지가 연금을 고스란히 남겼다며 토요와 만나던 아버지를 의심했던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매우 도덕적입니다. 강도와 강간, 살인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던져진 인간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되는지 초점을 맞춘 작품이 ‘라쇼몽’이었다면 시한부 인생 6개월로 죽음을 앞두게 된 노년의 사내의 삶과 결정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이키루’입니다. ‘이키루’는 ‘살다’라는 뜻의 일본어 동사인데 살아가는 의미는 쾌락이나 연애가 아니라는 도덕적 결말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만일 영화가 공무원들이 관료주의를 벗어나겠다며 결심을 다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구로자와 아키라가 제시하는 도덕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순진한 것에 불과했겠지만 역시 거장의 시각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공무원들은 사무실에서 언제 그런 결의를 다졌냐는 듯 다시 다른 부서에 민원을 전가하는 변함없는 관료주의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상자 하나 옮기는데에도 그 상자 가득히 서류가 필요하다’라는 대사에서 보듯 ‘이키루’의 각본을 직접 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관료주의의 뿌리 깊음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서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입니다.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기는 하지만 거들먹거리는 부시장을 제외한다면 다른 공무원들은 비교적 순진한 사람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려운 삶을 살지만 토요의 생기발랄함에 대한 시각도 긍정적입니다. 공원을 원하는 부녀자들의 모습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이러한 서민적인 시각은 ‘주정뱅이 천사’나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또하나 이미 ‘라쇼몽’에서 나뭇꾼으로,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사무라이들의 리더격인 ‘시마다 캄베이’로 등장하는 시무라 다카시의 진지한 연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큰 눈으로 다양한 표정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배우란 저런 것이군, 하는 감탄을 절로 나오게 합니다. 사실 리핑판으로 출시된 구로자와 아키라 dvd 박스셋은 ‘7인의 사무라이’와 ‘라쇼몽’을 위해 구입한 것이지만 ‘이키루’가 의외로 좋은 작품이어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제 ‘7인의 사무라이’ 차례군요.

by 디제 | 2004/09/30 18:17 | 영화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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