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 깊이가 돋보이는 묵직한 심리 스릴러

1984년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울리쉬 뮤흐 분)는 친구이자 상관인 그루비츠(울리히 터커 분)의 지시로 작가 드라이만(세바스찬 코치 분)과 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 분)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며 감시합니다.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올 것 없는 드라이만의 감시를 지시한 것은 크리스타를 범하려 하는 햄프 장관(토마스 티엠 분)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비즐리는 두 사람을 동정하게 됩니다.

냉전 종식을 코앞에 둔 1980년대 동독에서 횡행했던 감시 체제가 불러오는 비극을 묘사한 ‘타인의 삶’은 인간성의 양면을 깊이 있게 조명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감시와 피감시의 판옵티콘이 야기하는 인간성 파괴를 고발하는 상투적인 등식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 상황이 감시자와 피감시자 모두를 변모시키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감시자 비즐러는 피감시자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고난과 사랑에 감화되어 인간적으로 변화하며, 자신의 이기적인 예술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에 복종하던 드라이만은 스승의 자살을 계기로 저항적으로 변화하며, 드라이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했던 크리스타는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랑을 배신합니다. 세 사람의 점층적인 변화가 누적되며 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자극으로 가득하며 속도감 넘치는 헐리우드의 어지간한 스릴러들보다 더욱 밀도가 높습니다. 이처럼 인간성의 양극단을 넘나드는 등장인물들의 변화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인간성에 대한 부정보다는 긍정에 무게를 두지만, 결코 성급하거나 가볍지 않으며 묵직합니다. 영화가 끝났다고 속단할 수 있는 시점 이후에도 상당한 후일담이 남아 있으며, 그 후일담이야말로 진정한 주제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통일 전후의 독일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뒷받침되어 있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동독의 공산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반공영화 쯤으로 속단하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보다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의 불균형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에 대한 순수한 정치 영화로 보는 편이 합당합니다. 따라서 배경은 1980년대의 동독이지만 현재의 북한이나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극중에서는 동독의 감시 체제가 지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대중음악과 파티를 즐길 수 있으며 구타를 비롯한 직접적인 고문을 가하지 않는 당시의 동독은 아무리 봐도 현재까지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인(‘애교 있는’) 체제로 보이며, 택시까지 이용해 정치 사찰을 하고 물고문과 성고문을 일삼았던 1980년대의 군사정권에 비해서도 보다 신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통일 이후 분단 체제의 뒤처리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분단 당시의 과오를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처리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과오를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며 반성했던 독일인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도 맞닿아 있는데, 과연 친일파 척결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에서 통일이 된다면 분단 당시의 과오를 독일처럼 투명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통일 전후의 독일의 상황을 알고 있다면 영화를 즐기는 재미는 배가되는데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호네커에 관한 신랄한 풍자성 농담도 이해할 수 있으며 (호네커를 풍자하는 농담을 했던 젊은 정보부 직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눈여겨보면 종반부에 재미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통일 이후를 조명하는 다소 긴 장면들에 대해서도 쉽게 받아들 수 있습니다.

by 디제 | 2008/03/27 10:05 | 영화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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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월광토끼 at 2008/03/27 11:20
Das Leben De Anderen. 아주 괜찮은 영화였지요. 맨 마지막에 서점에서 "아뇨, 저를 위한겁니다" 라고 할 때의 여운이 인상깊었었습니다.
Commented by THX1138 at 2008/03/27 14:00
마지막 장면 참 좋았어요
Commented by 뽀사시 at 2008/03/27 15:04
정말 여운이 깊은 영화였습니다..아직도 울리쉬 뮤흐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일렁입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8/03/28 09:17
월광토끼님, THX1138님, 뽀사시님/ 그 마지막 장면, 왠지 구원받은 느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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