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가위 감독의 첫 번째 헐리우드 진출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지나칠 정도로 전작의 요소들이 반복됩니다. 마치 왕가위를 숭배하는 미국인 감독이 표절작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재즈와 올드팝 위주의 배경 음악이나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 느린 화면, 등장인물을 화면의 구석에 배치하는 미장센 등은 이미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에서,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장편 ‘2046’에 이르기까지 줄곧 반복된 ‘왕가위 클리셰’입니다. 카페에서 우연히 스쳐지나가게 된 남녀가 집 열쇠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한 없이 기다리는 것은 ‘중경삼림’의 반복으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전체적인 구조는 ‘중경삼림’의 복사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박사 레슬리로 등장하는 나탈리 포트만의 직업은 ‘화양연화’에서 공리가 분한 수리챈을,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타락천사’의 막문위를 빼다 박았고, 일상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하는 습관이나 카페에서 벌어지는 개싸움, 그리고 고가철로를 달리는 지하철은 ‘타락천사’를 연상시킵니다. 레이첼 와이즈가 분한 수 린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화양연화’와 ‘2046’에서 각각 장만옥과 공리가 분한 수리챈과 어감이 비슷합니다. 아내를 잃고 알콜중독에 빠진 어니(데이빗 스트래선)의 직업이 정복경찰관인 것은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에서 유덕화와 양조위가 각각 정복경찰관으로 등장했던 것과 동일하며 심지어 ‘화양연화’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화면을 뒷받침했던 ‘Yumeji's Theme’이 편곡만 바뀌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재삽입되었습니다.
변함없는 왕가위의 스타일만으로 열광한다면 배우들이 백인으로 바뀐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그런대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동사서독’과 ‘타락천사’ 이후 ‘2046’에 이르기까지 새 영화가 누적될 때마다 사랑의 아픔을 더욱 깊이 있기 다루며 페이소스를 자아내던 왕가위는 사라지고, ‘중경삼림’의 재기발랄함도 상실한 채, 단지 가벼움과 해피엔딩을 위해, 등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던 홍콩을 떠나 헐리우드로 온 것인지 의구심만 들 뿐입니다. 왕가위의 스타일이 아무리 좋아도 그에게 바라는 것은 진보이지 동어반복은 아닙니다.
아비정전 - 왕가위 월드의 원형
중경삼림 - 도시적이고 쿨한 감수성
중경삼림 - 12년 만에 필름으로 재회한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 왜 우리는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타락천사 - 우울과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타락천사 - 헤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
화양연화 -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46 - 엇갈린 사랑의 공허함
2046 - 두 번째 감상
2046 - 세 번째 감상
2046 - 네 번째 감상
에로스 - 세 편의 알듯 말듯한 사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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