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여명 - 이가흔의 에피소드와 금성무 - 양채니의 에피소드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여명 - 이가흔의 에피소드는 지쳐 보이는 여명의 쓸쓸한 미소와 여명의 침대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이가흔의 모습처럼 매우 진지하며, 사랑에 빠지자 머리가 금발로 변한 금성무와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남자를 가로채간 여자의 행방을 묻는 양채니처럼 가볍고 엉뚱합니다. 진지한 여명 - 이가흔의 에피소드에서 여명의 옷차림은 정장 스타일, 이가흔은 비닐 재질의 옷으로 딱딱한 느낌을 주고, 금성무 - 양채니 에피소드에서의 두 주인공은 가벼운 캐주얼 차림으로 차별화되었습니다. 여명 - 이가흔 에피소드의 테마곡은 슬픈 이별 노래인 ‘망기타’이고, 금성무 - 양채니 에피소드의 테마곡은 따뜻한 느낌의 ‘사모적인’으로 뚜렷이 대비됩니다.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여명과 이가흔은 언뜻 쿨해 보이지만 실은 소심했던 것입니다. 망설이기만 했던 두 사람 사이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막문위가 끼어들자 여명은 금세 사랑에 빠집니다. 물론 오래갈 수 없는 사랑임을 여명도 알고 있었고 곧 헤어지게 되지만 막문위의 대사와 여명의 팔을 무는 엉뚱한 행동처럼 이별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상대에게 잊혀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경 호텔의 구면이었던 이가흔과 금성무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곁에 없는 상대를 각자 추억하며 오토바이로 홍콩의 새벽 거리를 달리는데, 상대에게 잊혀지는 것이 두렵지만 정작 상대를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이달 말로 종영되는 ‘타락천사’는, 새로운 필름이 수입되어 새롭게 자막을 입힌 ‘중경삼림’과 달리, 지금은 사라진 수입사 모인 기획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옛 필름이어서 상태가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3년 전에 본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필름으로 관람하는 것은 역시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10년을 주기로 왕가위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먼저 ‘동사서독’을 반드시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정전 - 왕가위 월드의 원형
중경삼림 - 도시적이고 쿨한 감수성
중경삼림 - 12년 만에 필름으로 재회한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 왜 우리는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타락천사 - 우울과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화양연화 -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46 - 엇갈린 사랑의 공허함
2046 - 두 번째 감상
2046 - 세 번째 감상
2046 - 네 번째 감상
에로스 - 세 편의 알듯 말듯한 사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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