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장 리들리 스콧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비쥬얼리스트’입니다. ‘블레이드 런너’에서 ‘블랙 레인’을 거쳐 ‘글래디에이터’와 ‘블랙 호크 다운’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하는 것이 그의 전매특허입니다. 하지만 ‘비쥬얼리스트’라는 수식어 뒤에는 화려한 기교의 이면에 내러티브가 약하다는 비판이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것이 리들리 스콧의 영화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영상미보다는 철저히 내러티브로 승부합니다. ‘재키 브라운’의 엔딩 테마였던 바비 워맥의 ‘Across 110th Street’를 비롯해 블루스와 소울 위주의 OST가 깔리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잡아내는 동시에, 실재했던 마약왕의 성장과 몰락을 집요하게 뒤쫓는 형사의 모습은, 동시대의 연쇄 살인마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경찰과 기자의 모습을 묘사했던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촬영감독은 해리스 사비데스로 ‘조디악’에서도 촬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초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범피는 로렌스 피시번 주연의 ‘후드럼’의 주인공이었던 실재 인물이며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형사물의 걸작 ‘프렌치 커넥션’의 직후의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포인트입니다. 덕분에 156분에 달하는 긴 러닝 타임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단순히 흑인 갱 한 명의 삶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쟁 등 부정한 방법으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미국을 은유적으로 비판합니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전황이 비춰지는 월남전에서 최근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학살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지위에 대해, 마약과 살인을 통해 마약왕의 지위를 유지한 프랭크에 대입합니다. 게다가 프랭크를 비롯한 마약 조직을 수사해야 할 경찰 대다수는 압수한 마약을 판매하며 마약 조직과 연계되어 있는데 이 역시 미국 사회의 부패를 내부적인 시각에서 비판한 것입니다. 헐리우드에 오래 몸담기는 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진 리들리 스콧이 이처럼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를 연출한 것도 이례적입니다.
이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두 배우 덴젤 워싱턴과 러셀 크로우의 연기는 갱 두목과 형사라는 점에서 예단할 수 있는 과장되고 경직된, 소위 ‘어깨에 힘이 들어간 연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두 주인공은, 가정에 충실하지만 내면은 폭력적인 갱 두목과 가정에 소홀해 이혼 소송 중이지만 무식하리만치 청렴한 형사라는 점에서 갱스터 장르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지만 두 배우의 연기가 매우 사실적이라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는 점을 잊게 하며 몰입시킵니다.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시퀀스는 영화 시작 1시간이 훨씬 넘어야 처음 등장하며, 두 배우가 직접적으로 맞대결하는 장면은 사실상 단 한 장면뿐인데, 이 장면에서의 연기 역시 매우 자연스러우며 부드러워, 도리어 역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팽팽한 카리스마가 전달됩니다. 영화의 결말은 ‘킹덤 오브 헤븐’처럼 의외로 타협적이고 낙천적이며 거장의 여유가 풍겨 나옵니다.
긴 러닝 타임 동안 제대로 된 총격전 장면은 종반부의 한 번 뿐이지만, 쓸데없는 카메라 워킹이나 슬로우 모션과 같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생짜에 가까워, 리들리 스콧이 새로이 보여주는 영상 속의 힘입니다. 예고편의 장면 하나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나오지 않아 의아했는데 엔드 크레딧이 다 끝나고 나서 나옵니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장면이지만 말입니다.
블랙 호크 다운 -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다
킹덤 오브 헤븐 -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재미없는 기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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