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적 배경이 되는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세계화가 잘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별도의 화폐 단위를 사용하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도시답게 홍콩 사람들은 영어에 능숙하며 지명조차 여전히 영어로 부르는 것이 익숙한 곳이 많습니다. 세계화가 잘 이루어진 도시라는 뜻은 무국적성의 도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경삼림’의 배경은 홍콩이지만 영화 속 장소들은 홍콩이 아니라 뉴욕이나 도쿄, 서울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홍콩에 살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중경삼림’이 전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무국적의 도시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입니다.
무국적성의 도시라면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경삼림’의 주인공은 모두 홍콩인들로 보이지만 막상 그 주인공들로 분한 주연 배우들 중 왕정문(왕비)은 본토의 베이징 출신이고, 금성무는 일본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네시로 다케시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입니다. (금성무의 대사 중에는 일본어도 드문드문 섞여 있습니다.) 조연 배우들 중에는 백인과 인도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가운데, 배경음악은 중국의 전통 음악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드림’과 같은 팝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도시의 잡음 중에는 동남아 계열의 라디오 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술에 취한 임청하가 호텔에서 잠이 든 상태에서 금성무가 홀로 깨어 TV를 보는 장면에 등장하는 경극이 이채로울 정도입니다.
표피적인 것들만 코스모폴리타니즘에만 의존한 것은 아닙니다. ‘중경삼림’의 메인 테마가 인종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왕가위의 대다수 작품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버린다’ 라는 비관적인 주제를 ‘열혈남아’에서 ‘2046’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지만 유독 ‘중경삼림’에서만큼은 실연을 치유하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현란한 카메라 워킹과 속도감 넘치는 편집으로 군더더기 없이 경쾌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만, 그중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지속되어 결국 권태를 예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모르는 상황에서 도박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그 순간일 것입니다. 연인에게 실연당해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우거나 곰 인형 혹은 걸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엉뚱해 보이지만, 상대를 붙잡고 엉엉 울거나 하소연하며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더 쿨해서 보기 좋은 극복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의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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