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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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질척거림

강으로 흘러온 시체를 묶어 놓은 채 낚시를 즐기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중년 남자(‘발밑에 흐르는 강’), 역마살이 끼어 이사를 거듭하는 노파(‘상자’), 전재산을 날리고 차를 팔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여자(‘이 주행거리는 진짜니?’) 등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 ‘숏컷’에는 하나 같이 불행한 현실에 함몰되어 몰락하는 중산층이 담담하면서도 때로는 위트 있는 문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카버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러한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불행을 겪는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골몰하지만 전혀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카버는 이들의 이야기를 원인과 이후의 결과는 쏙 뺀 채, 불행한 상황 자체를 묘사하는 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도 그들의 불행의 해결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그런 상황이 더욱 사실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복보다 불행을 훨씬 민감하게 느끼며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골몰하면서도 전혀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카버의 단편집을 읽으면 재미있다는 감상보다는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섬찟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카버의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불행은 일상마저 잠식해 멍청히 집에 틀어 박혀 그간의 일들을 곱씹게 만들거나(‘블랙버드 파이’) 이혼한 전처를 방문해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등(‘친밀’)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게 합니다.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카버는 아내와 이혼하고 알콜 중독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으로 금전적 어려움을 겪으며 술이나 마약에 찌들리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거나 그 결혼 생활을 깨뜨리는 등장인물들은 결국 카버의 인생사의 투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카버는 질척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썼으며 그가 ‘심부름’에서 다룬 단편 소설의 대가 안톤 체홉과 같은 위치에 오르기를 원했던 것이겠죠.

군 복무 전후에 이 책의 초판을 사서 읽었습니다만 그 때의 감상과 그로부터 7년이 훌쩍 넘은 지금의 감상은 너무나 다릅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서였는지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거야?’라는 식의 짜증 섞인 반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때에 비해 조금 나이를 더 먹은 지금에 와서는 등장인물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꼬여버려 질척거리는 일상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그들의 고통을 말입니다.

덧글

  • TCIFM 2004/09/24 02:29 #

    '발밑에 흐르는 강'이 제가 제일 처음에 접한 카버의 작품입니다. 뭔가를 읽고 그 감동을 문자화해서 기억속에 더 오래 남기기위해 글을 쓰려고 하면 언제나 난감합니다. 그 감동이라는 걸 말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고 힘든데 무엇보다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가 없거든요. 멋진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그 기분을 묘사하려면 솔직히는 이렇습니다. '읽으면서 압도당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주 간단명료하고 많이 식상한 표현이죠...발밑에 흐르는 강을 읽으면서 제 첫 느낌이 사실 이랬습니다.
  • 디제 2004/09/24 10:36 #

    TCIFM님/ 이제는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를 읽고 있습니다.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쪽이 더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해서 읽기 편하군요. 추석 연휴 기간에 대비해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미리 주문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군요.
  • 비루고양이 2004/11/19 20:34 #

    구글에서 카버 검색해서 들어왔습니다. 카버 좋지요, 저의 훼이버릿 중의 훼이버릿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가 가장 좋아요. 대성당,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코끼리 등 가장 성숙한(그래서 가장 크게 공명하는) 카버의 작품들이 대부분 들어있어서.
  • moukatt 2004/12/14 04:18 #

    어떤 분의 영향으로, 카버를 보면 로브그리예가 생각납니다
    세계는 의미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거다, 그 말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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