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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 야성적 에로티시즘 영화

킹콩(1933) - 야성에 대한 열망

1976년작 ‘킹콩’은 저와 그다지 인연이 닿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어릴 적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두 번이나 놓친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일요일 밤 KBS-TV '명화극장'에서 해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부모님과 서울에 다녀와서 피곤해서 자느라 보지 못했습니다. 초저녁에 잠들면서 부모님께 영화가 시작되면 깨워달라고 했는데 깨워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한번은 낮에 TV에서 방영할 때였는데 이때는 시간을 잘못 맞춰서 킹콩이 죽은 엔딩 씬만 보았습니다. 킹콩이 죽자 제시카 랭(드완 분)이 울부짖는 장면이었는데 ‘엄마, 저 여자, 미친 거야?’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킹콩 같은 괴물의 죽음에 여자가 슬퍼할 리 없다고 어린 마음에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죠. 결국 지난달에 한정판 ‘킹콩’ dvd 세트를 구입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감상하게 된 셈입니다. 줄거리야 뻔히 다 알지만 영화는 줄거리를 알기 위해 보는 것은 아니니까요.

1933년작 ‘킹콩’과 1976년작 ‘킹콩’의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1933년작은 영화 촬영을 위해 출발한 배이고, 1976년작이 석유 탐사를 위해 출발한 배이며, 히로인인 두 여성이 배에 탑승하는 계기, 킹콩이 기어 올라가는 빌딩(1933년작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976년작은 9.11로 파괴된 세계 무역센터 빌딩), 킹콩을 공격했던 병기(1933년작은 복엽기, 1976년작은 헬기입니다. 참고로 위의 1976년작의 포스터는 킹콩이 손에 전투기를 쥐고 파괴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극중에는 전투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 포스터는 ‘거짓말’이죠.) 정도의 차이입니다.

1933년작과 1976년작의 근본적인 차이는 에로티시즘입니다. 1933년작이 킹콩의 야성미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킹콩과 히로인인 앤 대로우의 관계의 에로티시즘은 비밀스러우며 간접적입니다. 킹콩의 야성은 성적인 것보다는 파괴력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하지만 1976년작은 드완과 킹콩이 서로에게 성적으로 집착한다는 심리 묘사가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드완을 납치한 킹콩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드완이 옆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장면은 마치 첫날밤을 치른 신혼부부가 아침을 맞는 것처럼 카메라가 잡아냅니다. 또한 드완이 폭포에서 헤엄을 치고 나서 킹콩이 입김으로 말려주는 장면에서의 제시카 랭의 표정은 오르가즘에 빠진 여성 그대로입니다. (최근에는 나이가 들어 지성파 여배우로 각인되어 있는 제시카 랭이지만 ‘킹콩’에서의 이미지는 야성적인 킹콩의 성적 매력에 집착하는 신경질적이고 육감적인 금발 여자일 뿐입니다.) 킹콩은 자신에게 빠진 드완을 손가락으로 애무합니다. 만일 제가 초등학교 시절 1976년작 ‘킹콩’을 보았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장면들이었을 것입니다. 석유 회사의 중역인 프레드 윌슨의 입에서는 '강간'이라는 단어마저 노골적으로 입에 올려질 정도입니다.

킹콩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셨다면 차라리 흑백의 스톱 모션 기법을 응용한 1933년작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쥬라기의 유산인 익룡, 티라노사우르스 등과 킹콩이 혈투를 벌이는 비현실적인 액션은 1933년작에만 있을 뿐, 1976년작 ‘킹콩’에서는 킹콩이 괴물들과 맞서는 장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뱀과 싸우는 장면 하나 뿐입니다. 비주얼의 측면에서는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라 점프하는 장면이나 원주민들이 킹콩에 신부(드완)를 바치는 날 밤의 군무(역시 다분히 성적인 춤입니다.) 등이 볼만한 정도입니다.

그러나 1976년작 ‘킹콩’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 인물 간의 갈등관계와 이에 포함된 은유입니다. 돈에 환장한 석유 회사의 젊은 중역인 프레드 윌슨과 학술적인 호기심을 견디지 못해 밀항한 대학 교수인 잭 프레스캇(제프 브리지스 분, 뽀송뽀송하고 매력이 넘치는 20대의 제프 브리지스를 볼 수 있습니다.)의 대립은 문명 속에서의 자본과 지식의 대결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과 지식 그 어느 쪽도 야성(킹콩)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본은 상징하는 프레드는 킹콩에게 무참하게 죽음을 맞으며 지식을 상징하는 잭은 드완의 사랑도 제대로 얻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한 잭에게 드완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킹콩이 시야에 없을 때 뿐입니다. 킹콩만 나타나면 드완의 관심은 킹콩에게 고정됩니다. 결국 야성을 이기는 것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인 헬기의 기관총입니다. 야성을 이기는 것은 더한 야만 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2005년 크리스마스 개봉을 목표로 피터 잭슨이 제작중인 ‘킹콩’은 위에서 언급한 성적 은유로 가득찬 작품은 아닐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됩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족끼리 어울려 관람하기에 1976년작 ‘킹콩’은 다소 민망한 작품이었으니 말입니다. imdb의 데이터를 보면 1933년작에 등장했던 배역인 칼 데넘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76년작 보다는 액션이 강조되었던 1933년작 오리지널에 근접한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덧글

  • 질풍17주 2004/09/10 10:27 #

    킹콩...다른 식으로 하자면 현대판 미녀와 야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원숭이는 여성들에게 사랑을 얻게 되나 봅니다(폭)
  • 디제 2004/09/10 14:55 #

    아. 미녀와 야수에 관한 것은 1933년작에서부터 작품 속에 대사로 직접적으로 말할만큼 확실한 것이어서, 포스팅에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 almaren 2005/12/26 19:46 #

    점잖은 블로그에 별로 안어울리는 발언같기는 한데요,,,,, 사실, 킹콩은 변태죠. ㅠ_ㅠ
    만약 사람과 킹콩(혹은 고릴라)을 바꿔놓았다고 가정하면 영화로 만드는것은 아예 꿈도 못꿨을겁니다.
  • 디제 2005/12/27 12:13 #

    almaren님/ 킹콩이 변태라기 보다 모든 남성(혹은 인간)의 문명성 뒤에 감춰진 야성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모든 인간에게는 킹콩 같은 야성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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