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항의 출입국 관리를 총괄하는 프랭크 딕슨을 제외하고는 모두 빅터에게 호의적입니다. 착하고 순박한 빅터를 속이거나 괴롭히는 것은 미국의 관료를 대표하는 딕슨 뿐이며 처음에는 딕슨의 명령에 순응하며 빅터를 경계했던 그 부하 직원들조차 나보스키를 돕게 됩니다. 마치 미국은 모두 좋은 사람들만 있는데 일부 관료만이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영화적으로도 ‘터미널’은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영화입니다. 분위기도 따뜻하며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감상하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결말부에서‘터미널’이 크리스마스에 개봉되었다면 더욱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완전한 주인공을 따뜻하게 맞아 들이며 기회(아메리칸 드림)를 선사한다는 면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전작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매번 영화를 매끄럽게 뽑아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니 어련하겠습니까.
스필버그가 매끈하게 영화를 뽑아내는데 탐 행크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에 대해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일부러 살을 찌운 것처럼 보이는 탐 행크스의 어벙한 초반부 연기에서 공항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적응하는 후반부의 연기로의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훌륭합니다. 코미디 연기를 잘한다는 찬사야, 이미 ‘빅’에서부터 들어왔던 것이니 더 할 필요도 없겠지요. 캐서린 제타 존스는 출산 이후 더 예뻐진 것 같더군요. ‘시카고’에서는 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있었는데 ‘터미널’에서는 다시 활력을 찾은 듯 보입니다. 이외의 조연급들의 연기도 볼만했습니다. 사소한 에피소드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터미널’에서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사실상 영화의 전부인데 조연급이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면 영화는 탐 행크스 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굽타, 엔리케 역 등이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엔리케 역을 맡은 디에고 루나는 멕시코 출신의 1979년생으로 얼굴도 잘 생겼고 매우 젊으니 앞으로 주목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판론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스필버그는 지엽적인 문제를 디테일하게 제시하며 이것만 해결된다면 미국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극단적으로 비판한다면 유아적(幼兒的) 발상이라고나 할까요.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나보스키가 공항 한구석에 감시 카메라의 눈길을 피해 침실과 샘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그냥 내줄 정도로 허술한 나라는 아닙니다. 무고한 젊은이가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라크 파병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이루어졌건만 한국인의 미국 비자 발급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설령 그 비자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다 하더라도 ‘터미널’에서 지문 날인을 해야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터미널’을 보며 웃음을 터뜨려도 어쩐지 공허하며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미국 국민 대다수가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미국을 이끄는 것은 석유 재벌과 군산 복합체, 그리고 영화 속 딕슨과 같은 관료, 바로 부시, 럼스펠드, 라이스 같은 인간들입니다. 이들이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며 이들로 인해 지금의 미국은 어줍지 않은 침략 제국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하긴 이런 비판은 온당치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영화 감독은 없으며 모든 영화 감독들이 평생의 필모그래피 내내 극복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유독 스필버그만 유아적이라고 비판받는 것도 불합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영화를 잘 만드는 죄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세상은 아름답다는 식의 영화를 그냥 보아 넘기는 타입이 아니라서(디즈니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절대 안보며, 스티븐 스필버그와 미야자키 하야오를 꼬박꼬박 찾아서 보기는 하지만 언제나 뒷맛은 개운치 않더군요.)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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