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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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亂) - 셰익스피어와 불교적 세계관의 조우 영화

라쇼몽 - 변덕과 욕망, 허위와 거짓
이키루 - 관료주의 vs 시한부 인생
7인의 사무라이 - 시민 계급의 등장
거미집의 성 - 배신으로 일어선 자, 배신으로 망하다

이치몬지의 당주 히데토라(나카다이 타츠야 분)는 막강한 권력을 아들들에게 내놓으려 하자 이를 반대한 셋째 아들 사부로(류 다이스케 분)는 쫓겨납니다. 권력을 손에 넣은 큰아들 타로(테라오 아키라 분)와 둘째 아들 지로(네즈 진파치 분)는 아버지를 몰아내 히데토라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5년작 ‘란(亂)’은 그가 10년 동안 구상한 작품으로 엄청난 제작비로 인해 토호에서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프랑스인 제작자를 끌어들여 만든 장대한 서사 영화입니다. (구로자와 감독은 아내가 ‘란’의 제작 중 사망하자 단 하루만 촬영을 중단했을 정도로 집념을 보였습니다.)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에 일본 전통극 노(能)의 요소를 결합하였습니다. 주인공 히데토라의 얼굴을 보면 마치 가면을 쓴 듯 분장이 진하며 그로 분한 나카다이 테츠야의 연기와 대사는 매우 느립니다. 따라서 다케미츠 토오루의 음악은 서양의 교향곡의 일본 전통 피리가 각각의 장면에서 교차되어 사용됩니다.

1980년작 ‘카케무샤’는 ‘드레스 리허설에 불과했다’고 구로사와 감독이 언급했을 정도로 ‘란’의 비쥬얼이 주는 스펙타클은 압도적입니다. 1400여명의 엑스트라와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200여기의 말이 투입되었는데 엑스트라의 의상은 모두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대단히 원색적이고 화려합니다. 첫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타로의 군대는 아버지 히데토라의 색상을 본따 노란색으로, 둘째 아들 지로의 군대는 붉은색으로, 막내아들 사부로의 군대는 파란색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각각의 아들들의 군대는 색상뿐만 아니라 깃발로도 쉽게 구분되는데 서열에 따라 타로의 군대는 ‘一’, 지로의 군대는 ‘二’, 사부로의 군대는 ‘三’이라고 씌어진 깃발을 사용합니다.) 군대뿐만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의 의상 또한 매우 화려해 ‘란’은 1986년 아카데미에서 의상상을 차지했습니다.

성을 통째로 불태우는 중반부의 장면 또한 놀랍습니다. CG가 없던 시절의 작품으로 현란한 카메라 워킹 없이 우직하게 정지된 카메라가 비추는 성이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이나 무수한 기마대가 조총에 쓰러지는 전투 장면 등은 기교가 배제된 채 냉정하게 비춰질 뿐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의 초기 걸작인 ‘7인의 사무라이’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농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명예로운 사무라이들에게 철저히 감정을 이입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란’은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탐욕적이며 광란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은커녕 관객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주인공은 히데토라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첫째 며느리 카에데(하라다 미에코 분)는 어릴 적 부모를 히데토라에게 잃고 시집온 이후 끊임없이 복수만을 생각해온 광적인 여성으로 피칠갑의 복수극을 통해 이치몬지 가문을 멸문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는 모두 ‘업(카르마)’에서 비롯되었다는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란의 거의 모든 장면들이 클로즈업 없이 미디엄 숏의 고정된 카메라로 제시되는 것 또한 전지적 시점에서 사건들을 냉연히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의도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압축적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란’입니다.

클로즈업이 없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츠루마루 역으로 ‘음양사’의 노무라 만사이도 출연했습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쿄겐(狂言) 배우인 그는 ‘란’에서 클로즈업은 둘째 치고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만 그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엔딩은 그의 몫입니다.

덧글

  • glasmoon 2006/12/25 23:28 #

    말씀하신 셰익스피어와 노의 결합은 카게무샤도 그랬지만 란에서 정말 압권이었죠.
    그 둘이 이렇게 잘 어울릴줄은 보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CG로 온통 덧칠하지 않은 실황 그대로의 엄청난 스펙터클은
    새삼 '실제'라는 것만이 줄수있는 감동이죠.
    후자쪽은 현시대에도 충분히 먹힐것 같은데, 그래도 요즘 어린 분들이 보기에는 너무 지루할까요^^;?
  • mithrandir 2006/12/26 02:17 # 삭제

    예전엔 난과 가게무샤를 비롯한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들을 참 좋아했지만, 요즘은 이 할아버지의 지독한 허무주의에 질려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퇴폐적(좋은 의미로)이라고 할까요. 좋은 예술가이지만 거리감이 느껴져요. 심지어 7인의 사무라이같은 영화조차 마지막엔 쓴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나카다이 타츠야는 '할복'을 본 뒤로 감탄하게 된 배우인데, 나중에야 '란'의 그 배우와 동일인물이란 걸 알았습니다.
  • 디제 2006/12/26 10:59 #

    glasmoom님/ '카게무샤'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일본 전국 시대의 다케다 신겐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죠. 아마 '카케무샤'와 '거미집의 성'을 헷갈리신 듯...
    '요즘 어린 분들'이 보기에는... 글쎄요. 클로즈업이 없기 때문에 인물 구분이 어려워 지루해하지 않을까요? '요즘 어린 분들'은 클로즈업 위주의 드라마 같은 지나치게 연성화된 영상물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mithrandir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같은 것이 그의 주제의식인데 mithrandir님 말씀처럼 호오가 갈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지만 말입니다.
  • glasmoon 2006/12/28 19:33 #

    아아. 좋아하는 영화의 멋진 평에 황급히 덧글을 달다보니 말의 순서가 좀 뒤섞였네요.
    '노의 분위기는 카게무샤도 뛰어났지만 셰익스피어와 결합한 란에서 정말 압권이었죠' 로 정정합니다^^;;
  • 디제 2006/12/29 01:29 #

    glasmoon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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