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2월 28일
음란서생 - 한석규의 부활을 신고한 고급스런 사극
사헌부의 윤서(한석규 분)는 정빈(김민정 분)의 소장화를 복제한 일당을 의금부의 광헌(이범수 분)과 함께 소탕하다 음란 소설의 세계를 알게 된 후 뛰어난 문장력을 발휘해 직접 음란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라이벌 인봉거사의 작품에 맞서기 위해 윤서는 광헌을 끌어들여 정빈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삽화를 그리게 하자 그의 작품 ‘흑곡비사’는 장안의 화제가 됩니다.‘정사’와 ‘스캔들’의 각본을 쓴 김대우 감독의 데뷔작 ‘음란서생’은 농도 짙은 러브 씬이 범람하는 에로물도, 폭소를 자아내는 후련한 코미디도 아닙니다. 에로라고 하기에는 변변한 러브 씬 한 번 없으며, 큰소리로 웃을 수 있는 장면 또한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간질이는 듯한 영상과 까발리는 대사가 어울려 킥킥거리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 화려한 영상과 치밀한 미장센이 조화를 이루며 핸드 헬드와 부감 숏 등이 적절히 혼합된 카메라 워킹이 만들어내는 영상미는 매우 고급스럽습니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영상은 가급적 몇몇 개봉관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 상영을 통해 확인할 것을 권합니다.)
붕당 정치와 조선의 통치 제도 및 궁중 암투와 같은 소재를 끌어온 ‘음란서생’이지만 의외로 여러 장면에서 현대를 풍자합니다. 댓글, 동영상 등의 용어에 관한 언어유희(특히 영화 마지막에서 ‘흑곡비사’의 후속편 소설에 대한 이름을 짓는 장면은 영화를 웬만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을 수 있습니다.)나 베스트셀러를 둘러싼 출판 시장의 상업적 이면, 시청자의 압력에 의해 결말이 바뀌는 드라마 등에 대한 풍자와 작가의 창작에 대한 고뇌 등은 촌철살인의 힘을 발휘합니다. 궁중과 사대부를 배경으로 했지만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정통 사극보다는 현대극에 가까울 정도로 세련되고 간결한 것도 매력적입니다.
‘음란서생’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한석규의 부활입니다. 비중이 적고 밋밋한 캐릭터인 이범수와 스크린 경험이 적은 김민정을 확실히 이끌어준 한석규의 소심하면서도 능청스런 연기는 과거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색안경을 쓴 이후에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는 한석규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입니다. ‘주홍글씨’, ‘그때 그사람들’, ‘미스터 주부 퀴즈왕’ 등에서 쓴잔을 연이어 들이키며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힐난을 들어야 했던 한석규는 대박은 아니어도 최소 중박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며 복권을 확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정빈에 대한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는 후반부의 유일한 장면의 연기는 결코 과장되지 않았지만 진솔했습니다.
겉으로는 그릇가게를 운영하지만 실은 음란소설을 배급하는 황가 역의 오달수와 정빈 곁을 떠나지 않는 음흉한 조내관 역의 김뢰하를 대조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카우보이 비밥’의 제트 역의 성우 김기현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어 놀랐습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전도사로 등장했던 좌의정 역의 김병옥의 비중이 보다 컸다면 영화를 둘러싼 내러티브가 보다 풍부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극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 김민정은 예쁘기는 하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 미묘한 표정을 연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인봉거사의 정체를 후반부에 밝히며 반전을 시도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초반부의 경쾌함과 달리 중반부 이후에는 정통 사극 내지 멜러물에 가까워지며 감동을 코드로 삼았지만 차라리 일관되게 뻔뻔스런 경쾌함을 밀어붙였으면 보다 독특한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대사와 대사 사이의 침묵이 길고 템포가 느리다고 받아들일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형사’가 실패했지만 ‘혈의 누’와 ‘왕의 남자’에 뒤이어 ‘음란서생’도 흥행에 성공한다면 당분간 한국 영화계에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제작 러시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