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아이덴티티’는 로버트 레들럼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1988년에 제작된 동명의 TV 미니시리즈(국내 방영 제목은 ‘잃어버린 얼굴’)로도 유명합니다. (얼마 전 TV판도 dvd로 출시된 바 있습니다.) 어릴 적 보았던 ‘잃어버린 얼굴’에서도 주인공 제이슨 본은 기억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을 헤쳐 나갑니다. 하지만 맷 데이먼이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판 ‘본 아이덴티티’와는 몇 가지 차별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TV 시리즈였던 만큼 액션은 당연히 영화판 쪽이 휠씬 낫습니다. 영화판에서 파리의 세느 강 변을 끼고 벌어지는 소형 자동차를 이용한 추격 장면은 미국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넓은 도로에서 대형차를 동원한 자동차 추격 장면과는 분명한 차별성이 있었습니다. 마구 부셔대서 무식한 느낌이 들었다기 보다는 오밀조밀한 맛이 있었습니다. ‘킹 아더’에서 아더로 분한 클라이브 오웬(극중 배역명은 ‘교수’)과 본이 맞서는 숲 속의 격투 씬은 독특했습니다. 비록 몇 장면 등장하지는 않지만 클라이브 오웬의 무거운 마스크도 영화의 진지한 분위기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TV판 쪽이 나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본이 베트남 여성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자꾸 고통스러워하는데 영화판의 본은 2주전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자신의 진짜 직업이나 정체가 무엇인지 그다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범생 이지미인 맷 데이먼이 비록 ‘Fuck'이라는 안 어울리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만 극장판 본에 비해서는 훨씬 낙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의 낙천성에 집시처럼 사는 마리의 이미지도 밝은 편이어서 영화의 분위기는 TV판에 비해서는 훨씬 가볍습니다. 아마도 180분 이상이 보장되는 TV판에 비해 영화판은 120분 정도의 한정된 러닝 타임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굿 윌 헌팅’, ‘레인 메이커’ 등으로 정적인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었던 맷 데이먼의 연기 변신은 크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강인해 보이기 위해 몸도 상당히 불린 것 같더군요. 물론 몇몇 격투 장면에서는 화면을 빠르게 돌린 티가 너무 드러나서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후속편인 ‘본 슈프리머시’를 관람하기 위해 ‘본 아이덴티티’를 찾아 봤지만 영화는 액션과 스릴러 사이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본처럼 방황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액션 영화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다소 작고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긴박감이나 반전이 돋보이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손색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참, 곧 개봉할 ‘본 슈프리머시’에서는 ‘반지의 제왕’에서 에오미르로 등장했던 칼 어반도 출연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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