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 '그때 그사람들'의 조선 버전

남사당 패의 장생(감우성 분)은 여자 역할을 주로 맡는 공길(이준기 분)을 이용하려는 패거리에서 도망쳐 한양으로 향합니다. 돈이 궁해 육갑(유해진 분) 일당과 합류한 장생과 공길은 왕을 풍자하는 마당놀이를 벌이다 내관 처선(장항선 분)의 눈에 들어 궁에 들어가 연산군(정진영 분)과 장녹수(강성연 분) 앞에서 공연하게 됩니다.

자자한 입소문을 바탕으로 흥행 몰이를 하고 있는 ‘왕의 남자’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입소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걸출한 대형 스타도 없이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제치고 개봉 첫 주 115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 오피스 1위로 올라선 것은 그만큼 영화 자체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과연 관객들의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당놀이와 궁중 사극을 절묘하게 혼합한 ‘왕의 남자’는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관객을 웃겼다 울리며 예정된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이처럼 정통 사극과 현대 정극, 그리고 코미디를 적절하게 결합한 수작이 나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미 퓨전 사극 ‘황산벌’로 노하우를 쌓은 이준익 감독의 연출력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약간의 역사적 지식만 있다면 ‘왕의 남자’는 더욱 흥미진진한 작품이 됩니다. ‘경국대전’을 완성시키며 조선의 통치 체제를 완성한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폐비되고 사사된 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 있습니다. 즉위 후 그는 기생 장녹수를 궁궐에 끌어들인 후 향략을 일삼다 성희안과 박원종이 이끄는 중종 반종으로 폐위되는데 이 과정에 허구를 가미한 ‘왕의 남자’는 흥미진진한 역사극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권력자가 향락에 심취하고 폭정을 일삼다 권좌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과정을 희극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왕의 남자’는 10.26을 소재로 제작되었다 수구 세력의 반발로 가위질된 채 개봉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모성애가 결핍된 ‘왕의 남자’의 연산군과 지치고 노회한 늙은이인 ‘그때 그사람들’의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인 묘사 또한 유사합니다. 따라서 ‘왕의 남자’는 ‘그때 그사람들’의 조선 버전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습니다.

왕이든 광대든 거대한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으며 파멸해 나간다는 주제 의식은 ‘누군들 광대가 아니랴’라는 연극 제목을 연상케 합니다.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은 정지 화면으로 종결되며 여운을 강렬하게 남기는 엔딩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공길을 둘러싼 장생과 연산군의 대립은 다분히 동성애적 삼각 관계를 암시하는데 놀랍게도 동성애적 사극의 대표작 ‘패왕별희’에 대한 노골적인 오마쥬 혹은 도전은 매우 대담합니다. 공길, 장생, 연산의 개성과 대립이 강렬해 장녹수는 오히려 기도 못쓰고 잠식당한 듯 합니다. 이는 강성연의 연기력 부재보다는 각본상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만일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도 야릇한 애증 관계를 개입시켰다면 ‘왕의 남자’는 더욱 입체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고 학벌을 지녔기에 데뷔 초기부터 화제가 되었던 감우성이 권력을 조롱하는 무정부주의적이며 냉소적인 광대(천민)로 분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에 맞서 불안정한 심리 상태의 권력자 연산군 역의 정진영 또한 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쌓아온 연기력으로 감우성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양념처럼 등장하는 유해진의 과장된 연기와 묵직하고 점잖은 윤주상의 상반된 연기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왕의 남자’의 가장 큰 발견은 바로 공길 역의 이준기입니다. ‘패왕별희’의 장국영에게 도전장을 던지듯 기묘하고 중성적인 이미지의 그는 연기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선굵은 성격파 남자배우들이 판을 치는 한국 영화계에 단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최근 친일 발언으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사소한 해프닝을 극복하고 진정한 배우(광대)가 되어 한국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해주기를 바랍니다.

by 디제 | 2006/01/04 00:33 | 영화 | 트랙백(8)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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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AGA at 2006/01/04 00:50
동생이 보러가자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작품입죠. 예고편과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니 감우성, 정진영, 이준기의 캐릭터보다는 강성연이 맡은 장녹수가 파묻혀버릴 거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는데 현실화되었군요. 동생을 위해서라도 시간을 내서 보러가야겠습니다.
Commented by hikage7 at 2006/01/04 01:04
이 영화 그렇게 입소문이 세던데 이거 정말 한번 봐야겠습니다. 궁금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버리네요...;;
Commented by 慧麟 at 2006/01/04 01:07
우와 같은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멋지게 풀어내시다니-_-대단하십니다;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Commented by 스키아。 at 2006/01/04 01:08
연산은 어머니를 보지 못한채 성장했고, 간절히 어머니의 존재를 원했지만 끝내 묵살당한채 왕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죠..어머니를 보고싶다는 그의 욕망은 어느 한 순간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 때 당시의 신하들과 후궁들을 죽이는 사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각자 다르게 표현한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장녹수가 연산에게는 어머니의 존재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정말 아쉬운 점은 녹수의 비중이 나머지 셋에 비해 확연히 묻혀서 질질 끌려간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점입니다..캐릭터는 잘 만들었는데 비중이 웬수입니다 ㅠ_ㅠ
Commented by 휴고 at 2006/01/04 01:27
항상 그렇지만,영화를 보고 나름의 글을 올리고 난후,
디제님의 블로그에 들러 그에 대한 평을 봐야 정말 제대로 영화한편 본것 같아요
Commented by toonism at 2006/01/04 02:07
장녹수의 역이 너무 작아서 많이 아쉬웠습니다만, 중간에 '젖 줄까? 젖 줄까?' 하는 부분이라든지 치마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장면은 충분히 강했지요.
공길과 녹수 사이의 갈등이 크게 표출되지 않은 부분은 참 아쉽습니다.
Commented by ★슈쨩★ at 2006/01/04 09:06
트랙백 해 주셔서 왔습니다. ^^ 생각보다 깊게 안 봤었는데 디제 님 글 읽고 나니 두 번째 볼 때는 유심히 보게 될 것 같네요. 확실히 강성연 씨의 연기가 파묻힌 것도, 공길과 녹수의 대립이 많이 아쉬웠지요. 그래도 무난히 넘어간다는 거에 플러스 점수를 줘도 괜찮지않을까 합니다.
'공길'이란 이름은 연산군 일기에 실재로 나옵니다. [공길이라는 광대가 왕에게 '왕 같지 않으니 쌀이 쌀 같지 않다'고 말하였다가 참형을 당했다]라는 문장이 있었고, 이게 '왕의 남자'의 시작이었다고 하네요. (태클 아니에요~ ^^;)
Commented by xmaskid at 2006/01/04 09:31
트레일러만 봤을때는,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감이 안잡혔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봐야 할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Commented by 나무피리 at 2006/01/04 13:10
전 두 번 봤어요. 볼때마다 다른 생각이 들어서 좋았구요.
처음에는 장생에게, 두번째는 연산에게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Commented by 이준 at 2006/01/04 18:19
1. 사실 연산군의 실제 햏각(조선왕조에 실제로 "군"으로 격하된 임금은.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의 세명입니다. 노산군은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되지만)이 다른 "군"들보다 충분히 엽기적이었기 때문에 소재로는 괜찮았습니다. TV 드라마로는 충실한 재현(조선왕조 5백년), 인물에 대한 (왜곡된) 소개(장녹수)등등의 여러 작이 있었고 영화로는 연대기에서 마지막에 핀트가 나가버리는 작품(금삼의 피), 명성만으로만 승부했던 졸작(연산군), 충실한 연대기(연산일기)등등이 있었습니다.

2. 대부분의 경우야 연산 1인 독주쇼를 보여주거나 (특히 유인촌씨가 주연한 연산일기가 대표적입니다.) 장녹수의 비중이 그냥 저냥한 물건 수준이 많습니다. 장녹수가 전면으로 나온 작품이라야 이대근씨가 주연한 연산군이나 TV 드라마 정도이죠. 장녹수가 전면에 나서지 못한건 뭐 전통이지만 이 작품의 성격상 묻혀버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죠
Commented by 이준 at 2006/01/04 18:25
3. 이번에 해석된 연산군도 상당히 맘에 듭니다. 지나친 감정과잉으로 자칫 광기를 덮었던 연산군들(신영균, 이대근, 유동근- 후자는 심지어는 왕권강화라는 기괴한 논리까지 들고 오는) 감정변화에 극단으로 치중한 나머지 거대한 운명론적인 연출이 미흡했던 유인촌씨의 연산군과는 달리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고나 할까요. 주제의식인 운명론을 적절히 배합할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정진영씨가 이전에 맡지 않았던 역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가치가 있죠. 연산군의 그 광기에 대한 설명도 상당히 각색이 잘되어 있고

4. 고증론과 현대적 해석의 양극단을 적절히 조화시킨 작품입니다. 정말로 괜찮은 작품이죠

PS: 연산군을 소재로 한국판 "칼리귤라"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아즈모단 at 2006/01/04 19:07
이것도 한때나마 역사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 이런 흥미로운 해석의 영화는 언제나 대환영입니다^-^
Commented by 베로니카 at 2006/01/04 21:43
안녕하세요. 에우님 블로그 타고 왔어요. 링크 신고합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6/01/05 00:35
SAGA님, 스키아。님, toonism님/ 장녹수의 비중 축소에 대해서는 감독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장녹수까지 비중을 할애하면 장생, 공길, 연산의 삼각관계의 힘이 떨어질까봐 둘째, 관객들이 플롯을 부담스러워할까봐 단순화시킨 것 같습니다.
hikege7님, xmaskid님/ 저도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감이 잘 안왔는데(저는 예고편이나 팜플렛도 안보고 영화를 보러 갑니다.) 10분만 보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감이 확실히 오더군요. 어찌보면 뻔한 결말로 가는 것인데도 그 과정이 정말 설득력이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慧麟님, 휴고님/ 과찬이십니다. ^^
★슈쨩★님/ 태클이라뇨. 정확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나무피리님/ DVD로 발매되면 저도 소장하고 반복감상하고 싶습니다.
이준님, 아즈모단님/ 연산군의 성종에 대한 컴플렉스와 어머니를 죽였다는 증오, 모성애 결핍은 진작부터 연산군의 파멸의 원인으로 지적되던 것이죠.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이 신권의 보수성에 대항한 사람이라는 독창적 해석과 정진영의 폭발하는 연기가 더욱 좋았습니다.
베로니카님/ 링크 환영합니다. ^^


Commented by EST_ at 2006/01/05 21:47
차분한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이준기에 대한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중성적인 이미지에 파묻히지 않고 좋은 연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6/01/06 00:09
EST_님/ 감사합니다. 다 좋은 영화를 본 덕분이죠. ^^
Commented by Vincent at 2006/01/08 12:2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는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지만 (동성애적 코드에는 거부감이 ;;) 이병우의 음악은 좋았습니다.
Commented by Ritsuko at 2006/01/10 22:37
시나리오도 좋았고 연상군을 연기한 정진영도 좋았습니다 근데.. 완성도가 떨어지네요
Commented by 디제 at 2006/01/11 00:26
Vincent님/ 동성애적 코드는 있었지만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 대중들에 대한 거부감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Ritsuko님/ 완벽한 영화는 아니긴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Ritsuko at 2006/01/22 18:38
우선.. 강성연의 케릭터 묘사가 뭐랄까 상투적이라고나 해야할까요... 요부같으면서도 모성을 느끼는 케릭터인데 무언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고 기대를 저버리는 오프닝 신이나 조금은 안 어울리는 카메라 앵글등이 눈에 거슬리더군요... 분명 멋진영화이지만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운 영화였습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비해서는 매우 아쉬웠던 퀄리티였던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6/01/22 23:18
Ritsuko님/ 죄송합니다만 '시나리오의 완성도이 비해 강성연의 캐릭터가 상투적이었다'는 표현은 앞뒤가 안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강성연의 캐릭터가 상투적이었다면 그것은 시나리오의 한계였겠죠.
Commented by Ritsuko at 2006/01/23 14:06
상투적이라고 했던 것이 배우가 그 정도 밖에 역을 소화를 못 시킨다는 것이 었어요;;;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좀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이니....
Commented by shyuna at 2006/02/06 17:59
연극보다 영화가 볼거리가 많고,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더 잘되어서 확실히 몰입감이 좋았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많이 실망했었는데.. 영화는 너무 좋더라구요.. 뒤늦게나마 잘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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