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달콤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내 사랑은 익숙함에서 지겨움으로 변하고 결국 헤어짐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별의 아픔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랑했던 그(혹은 그녀)와의 추억을 모두 잊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 구절에서 따온 ‘이터널 선샤인’은 실연의 아픔이 과연 기억의 소거로 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기억의 변화와 공간의 재배치가 직결된다는 점에서는 ‘다크 시티’를, 인간의 기억에 대한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고찰은 ‘메멘토’를, 자신의 뇌로 들어가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살펴본다는 점에서는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맡은 찰리 카우프만이 역시 각본을 담당한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상케 합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20여분이 지나서야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는 ‘이터널 선샤인’은 종반에 이르면 왜 오프닝 크레딧이 그렇게 늦게 올라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수미상관식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니체는 실수마저 잊도록 해준다며 망각을 예찬했지만 이를 두 번이나 극중에서 인용한 ‘이터널 선샤인’은 짧은 인생에서 모든 기억은 아름답건 창피하건 간에 모두 소중하다는 긍정론을 외치며 니체의 경구에 반기를 듭니다. 어떤 기억을 혐오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그 순간을 긍정하고 그리워하도록 바뀌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는 오버스런 3류 코미디 배우쯤으로 알려진 짐 캐리의 진정한 배우다운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미 ‘트루먼 쇼’에서 정극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까칠한 수염도 깎지 않고 다양하지만 결코 과장되지 않은 표정으로 소심남을 자연스럽게 연기합니다. 앞으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짐 캐리 뿐만 아니라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엘리야 우드 등 모두 기름기(메이크 업)가 빠진 듯 일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속옷 차림으로 침대 위를 방방 날뛰는 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장면이라 놀라웠습니다.
이처럼 배우들이 꾸미지 않은 듯 출연한 것은 핸드 헬드로 다큐멘터리처럼 거친 영상으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상당히 실험적인 시나리오(지난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가 덧붙여져 ‘이터널 선샤인’은 독특한 사랑 영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입소문이 대단했던 '이터널 선샤인'의 국내수입사가 대형 회사가 아니어서 개봉을 계속 미루고 홍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이제서 개봉되는 것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내러티브가 복잡하고 눈이 아플 정도로 영상은 흔들리고 거칠어 대중적인 흥행 영화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썰렁하게 개봉되고 내려갈 범작은 아닌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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