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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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남자라는 이름의 수컷 영화

홍상수 영화를 본 사람의 평가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흔한 부류는 지루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입니다. 홍상수 영화가 흥행 영화는 아니기 때문에 저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가장 많다고 볼 수 있겠죠. 둘째는 우스워 죽겠다, 입니다. 인간의 추한 면을 정지된 카메라로 빨아들이듯 보여주는 홍상수 영화를 킬킬거리며 보는 부류말입니다. 끝으로 홍상수 영화의 본질을 꿰뚫어보며 일상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답답함에 질식할 듯한 불쾌감을 느끼시는 분들입니다. (참고로 저는 두번째 부류입니다. 홍상수 영화를 코미디 보듯 하니까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까지 홍상수의 영화는 꼬박꼬박 놓치지 않고 챙겨보았습니다. 영화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하며 영화 속에서마저 한국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편견 때문에 가급적 한국 영화를 피하곤 했습니다만 홍상수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국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서양에 흔히 알려지는 동양 영화가 의존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없으며 지구상의 어떤 나라의 이야기라 해도 설득력 있는 무국적성과 신선함 때문에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프랑스에서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홍상수 영화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는 것은 우선 일상성입니다. 과장된 연기와 분위기가 난무하는 한국 영화에서 지루해 보이는 롱테이크로 별 의미 없는 대사를 반복하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홍상수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롱테이크 장면의 대부분에서 배우들은 연기에 관해 상당한 압박을 받으며 조금만 실수해도 템포가 엉망이 되어 재촬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의 대부분이 술마시는 장면이고 실제로 감독이 배우들에게 술을 먹인다고 하니 배우들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연기일텐데 말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남자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은 기존의 깔끔한 이미지를 버리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살을 찌운 채 등장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 역시 뱃살이 늘어질 정도로 살을 찌웠습니다. '올드보이'에서 탄탄한 몸을 자랑하던 유지태는 온데간데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한때 청춘스타로 각광받았지만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유지태가 뱃살이 늘어지는 팔자 걸음 아저씨로 변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또하나의 일관된 요소는 성욕에 사로잡힌 남자들입니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 캐릭터들은 섹스에 집착하는데 여자와의 만남이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간에 하나같이 여자와의 관계에서 일그러진 욕망을 드러냅니다. 남자들의 욕망이 일그러진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서는 곤란한 소위 '먹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교수를 지망하거나 번듯한 샐러리맨, 연극 배우 등 이른바 '배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만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혼외정사나 친구의 여자와 관계하기 등 추한 면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남자들이 저렇게 추한 것은 아닌데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역시 이와 같은 홍상수 영화의 일관된 요소들이 반복, 변주됩니다. 중국집에서 고추 잡채를 시켜놓고 배갈을 마시는 두 사내의 대화는 선화(성현아 분)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 전까지 스토리의 전개와는 무관하지만 카메라는 집요하리만치 움직이지 않고 두 사내를 응시합니다. 두 사내는 모두 중국집 여종업원을 유치한 방식으로 유혹하며 선화와의 섹스를 회상합니다. 선화를 만나서도 둘은 모두 선화에 대한 성적 욕망을 재차 실현하려 안간힘을 쓰고서는 뻔뻔스럽게 돌아서버립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선화를 찾아나섰던 문호(유지태 분)는 자기 학교의 제자들을 우연히 만나더니 이상한 꿈을 꾸고나서 그들에게마저 성욕을 드러내고 헌준(김태우)은 어떤 이유인지 갑작스레 선화의 곁을 떠나버립니다. 두 남자가 선화를 회고하고 만나러 부천까지 갔지만 이야기는 황당하게 문호와 제자인 경희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더니 90분이 채 안되는 짧은 러닝타임만에 갑작스레 끝나고 맙니다. 선화를 만나러 갔다면 선화와 어떤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했던 관객들에게 황당한 결말을 제시합니다. 기승전결이 분명치 않은 채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셈지요. 심지어 선화의 앞니가 부러진 것과 관련된 이야기도 등장할것 같았지만 나오지 않더군요. 목소리만 나오는 김호정이 등장하는 많은 장면이 편집과정에서 제외된 것 같은데 이것이 포함되었더라면 보다 친절한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극장 개봉 당시 보았다면 칸의 경쟁 부분 시상이 애당초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진작에 했을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의 짜임새 면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보다 못하니까요. (하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구효서의 원작 소설이 있었지요.)

이제 홍상수 감독의 다음 영화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비록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실망스런 영화이기는 했지만 일상성과 남자의 추악함을 다룰 줄 아는 감독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으니까요.

덧글

  • anakin 2005/05/31 15:56 #

    제가 처음 접했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네요. 전 이 영화 보다가 웃겨서 쓰러지는 줄 알았는데, 다들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군요;;
  • 디제 2005/05/31 17:54 #

    anakin님/ 제게는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 좀 짜증스러웠습니다. 처음보셨다면 느낌이 다를 수 있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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