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작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카사블랑카’는 명성과는 달리 매우 통속적이며 어용적인 영화입니다. 냉소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듯 하지만 감상적이고 쉽게 상처받는 남자, 남자를 버렸지만 다시 갈팡질팡하는 여자, 지나치게 올곧으며 신념으로 뭉친 연적의 삼각관계, 부패에 찌든 경찰 서장, 수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들락 거리는 바, 전쟁의 와중에 안전한 도시로 피난하기 위한 항공편을 구하는 혼돈(건담 팬이라면 통행증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루트로 거래하는 장면에서 ‘기동전사 Z건담’의 제17화 ‘홍콩 시티’의 루오 상회를 연상했을 것입니다.)에 이르기까지 이후의 영화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수많은 클리셰로 가득합니다.
이데올로기 면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신음하는 미국인과 연합국의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선전선동적 측면이 강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치의 앞잡이이자 괴뢰 정권인 비시 정권에 대한 냉소와 레지스탕스에 대한 우호적 시각(독일 군가를 압도하는 ‘라 마르세예즈’ 합창으로 노골화되어 있습니다.)은 이라크 침공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을 빚어온 최근의 미국의 입장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을 자아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프랑스가 반대하자 WWE에서는 프랑스인 배역을 맡은 캐나다 출신의 레슬러들에게 악역을 맡긴 바 있습니다. 하지만 ‘카사블랑카’가 개봉되었던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과 프랑스는 소중한 동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사블랑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단신이며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험프리 보가트와 고혹적인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랑(릭과 일사의 키스 씬은 여러차례 나오지만 정작 부부 사이인 빅터와 일사의 키스 씬은 전혀 없습니다. 일사는 릭을 사랑한 것이라는 관객의 환상을 충족시킵니다.) 고뇌는 통속적이지만 동시에 설득력 있으며 연극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의외의 반전을 바탕으로 빠르게 전개됩니다. 로맨스와 드라마 이외에도 느와르와 첩보물을 뒤섞은 혼성 잡종에 가까운 ‘카사블랑카’는 명화라고 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반복 상영되어 컬트 무비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As time goes by’) 잊혀지지 않는 영화는 흔치 않지만 ‘카사블랑카’는 60여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도 당당히 살아남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사족이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자고, 사랑하고 싶은 여성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면 험프리 보가트의 대사는 몇 마디 외워두고 써먹는 편이 좋습니다. 워너의 SE DVD 자막에서는 밋밋하게 번역되었지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쯤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암기해두시길.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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