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란 - 담담하게 밀려오는 슬픔

역도산 -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실패한 아쉬움

불법 비디오를 제조해 파는 경수(공형진 분)와 함께 사는 강재(최민식 분)는 동기이지만 조직의 보스가 된 용식(손병호 분)이 저지른 살인죄의 누명을 대신 뒤집어쓰기로 합니다. 자수를 마음 먹은 그는 호적만 빌려준 중국인 아내 백란(장백지 분)의 죽음을 통보받습니다.

‘파이란’은 일본의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원작 소설에 바탕을 둔 멜러물이며 백란을 제외한 남자 캐릭터들은 조폭입니다. 한때 한국 영화계 흥행의 양대 코드였으나 천박함으로 지탄을 받았던 멜러와 조폭이라는 소재를 동시에 포함했지만 ‘파이란’은 좀 다릅니다. ‘파이란’의 조폭은 결코 코미디나 액션을 위해 선택한 소재가 아니며 멜러는 감정의 과잉으로 눈물을 쥐어짜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강재는 결코 싸움을 멋지게 하는 것도 아니며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도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를 3류 인생으로 치부할 만큼 어리숙하지만 여기서 벗어나 배 한척과 함께 금의환향하는 것이 꿈입니다. 비유하자면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와 브라이언 드 팔머의 ‘칼리토’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중간 쯤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멜러 또한 극적인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내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며 잔잔하고 담담하게 슬픔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일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3류 멜러가 되려했다면 백란의 죽음을 초반부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결말에 배치했을 것입니다. 혹은 백란이 죽기 직전에 강재를 만나게 해서 ‘이래도 안 울래?’하고 관객을 윽박지르는 전개를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란’은 관객이 이해하기 쉽고 눈물을 흘리기 쉬운 정석적인 멜러의 내러티브를 탈피해 이미 죽은 백란의 삶을 강재가 뒤따라가는 로드 무비 형식으로 교차 편집하며 제시합니다. 결국 백란과 강재가 (살아서) 만나지 못하기에 ‘파이란’의 비극성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강재를 연모하는 백란의 사랑이 비현실적인 감은 없지 않지만 이 정도의 설정은 멜러물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너그럽게 용서할 만한 범위 내의 것으로 보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열연하는 최민식의 연기는 단연 발군입니다. 뭐하나 되는 것 없는 3류 날건달로서의 최민식의 연기는 카리스마보다는 자연스러움에 가깝습니다. ‘파이란’ 이후 ‘올드 보이’, ‘주먹이 운다’에서 모두 엇비슷한 이미지였던 점은 아쉬웠는데 이번 주 개봉할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변신이 기대됩니다. 최근에는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한 장백지이지만 ‘파이란’에서의 연기만큼은 청순함과 다소곳함이 빛납니다. 감초 같은 역할의 공형진의 연기도 매우 좋습니다. 처음 등장할 때 ‘짭새~!’하며 노래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은 가히 압권입니다. ‘카라’로 혹평을 면치 못했던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은 ‘친구’에게 밀리는 바람에 흥행은 실패했지만 평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역도산’에서 실망스러웠던 송해성의 네 번째 작품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by 디제 | 2005/07/24 23:40 | 영화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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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FOE뽀에 at 2005/07/25 00:38
군대에서 장백지에 광분한(...) 고참들한테 끌려가서 본 영화인데... 여기서 최민식에게 완전히 꽂혔지요~(민식이 형님~ 아우~ >o<)/)
Commented by THX1138 at 2005/07/25 01:08
전 마지막에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나쁜놈에게 질질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비디오속의 백란의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더군요.
Commented by 디제 at 2005/07/25 02:53
FOE뽀에님/ 최민식은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이휘향의 사생아였던 '꾸숑'일 때부터 멋있었습니다. 우연히 보았던 제1화에서 카리스마 넘치던 젊은 남자 배우에게 매혹되었던 것이죠.
THX1138님/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었는데도 슬펐죠. 그게 '파이란'의 장점입니다.
Commented by 대추 at 2005/07/25 08:15
방파제에 앉아 백란의 편지를 읽다가 눈물의 삼키던 모습에 울컥 하는 느낌..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다 그런 느낌을 받으셨겠죠..
Commented by 디제 at 2005/07/25 22:11
대추님/ 그게 저도 가장 슬픈 장면이었습니다.
Commented by drtheater at 2005/07/27 03:34
장백지가 혼혈아라고 해서 놀랐어요.
Commented by 디제 at 2005/07/27 23:00
drtheater님/ 어머니가 영국인이라는데 어머니와 많이 닮았더군요.
http://letsmusic.gmy.cc/bbs/zboard.php?id=1st_news&no=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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