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네 편의 배트맨 시리즈가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는지에 관한 과정은 생략한 채 적과의 대결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면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성장 과정을 야심차게 묘사합니다. 거부(巨富)인 부모의 죽음에서, 슈퍼맨과 같은 초능력자가 아닌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고난이도의 ‘배트 액션’을 선보이게 되었는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면과 배트 슈트, 표창과 와이어, 손목의 보호대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무기인 배트맨이 어떻게 이러한 무기를 제작하고 몸에 익히게 되었는지 자세히 묘사됩니다. 만화적 이미지의 곡선적인 배트맨의 박쥐 모양 로고도 금속성의 직선적인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DC 코믹스의 원작 만화는 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의 영웅이자 자본주의의 돈 냄새 물씬 풍기는 재벌 배트맨의 정신 세계와 무술이 실은 모두 동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과거 네 편의 영화에서는 현실 세계와 유리된 듯한 공간이었던 고담 시였지만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고담 시 이외의 다른 나라와 다른 도시가 공간적 배경으로 제시되는 점 또한 이채롭습니다. 특히 이전의 영화들에서 매끈하기만 했던 배트 모빌은 터프한 장갑차의 수준으로 거듭나 사실성을 배가시킵니다. 한스 짐머 등이 참여한 웅장한 배경 음악은 액션 장면에서 마구 아드레날린을 뿜어 올립니다.
그렇다고 특수효과의 볼거리에만 치중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조연들의 면면이 너무나도 화려해 팜플렛의 소개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모건 프리먼, 리암 니슨, 게리 올드만, 와타나베 켄, 루트거 하우어, 킬리안 머피에 이르는 조연급은 초호화 캐스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폭스 역의 모건 프리먼에게는 ‘쇼생크 탈출’과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관조적인 조언자의 이미지가, 듀카드 역의 리암 니슨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의 콰이곤 진과 ‘킹덤 오브 헤븐’의 고프리와 같은 스승의 이미지가, 라스 알굴 역의 와타나베 켄은 신비스런 선문답을 주고 받는 카츠모토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레옹’에서 잔혹한 약물 중독 형사 스탠스필드였던 게리 올드만은 범생 형사 고든으로, ‘28일 후’에서는 올곧은 청년 짐이었던 킬리안 머피는 속을 알 수 없는 의사 크레인으로, ‘블레이드 러너’에서 반항적인 사이보그 로이였던 루트거 하우어는 웨인 그룹을 집어 삼키려는 교활한 중역 얼로 기존의 이미지를 전복시켜 등장합니다. 이렇게 화려한 조연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트맨 비긴즈'는 즐겁습니다. 탐 크루즈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케이티 홈즈가 브루스 웨인 역의 크리스찬 베일과 옥의 티처럼 잘 어울리지 않아 아쉬웠지만 말입니다. 타이틀 롤을 담당한 크리스찬 베일의 캐스팅은 더 할 나위 없이 적역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배트맨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배트맨’과 ‘배트맨2’의 마이클 키튼보다 훨씬 더 배트맨 다웠습니다.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심각한 이미지에 날씬한 체형과 강인한 턱은 바로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빛낸 것은 특수 효과도 배우도 아니었습니다. 브루스 웨인의 고뇌와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최종 보스를 끝까지 숨긴, 블록버스터답지 않은 탄탄한 시나리오가 작품을 빛낸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브루스 웨인의 성장과 배트맨의 활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140분의 다소 긴 러팅 타임이 필요했지만 초반부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면 중반부 이후부터는 정신없이 몰아칩니다. 고담 시를 구한 배트맨에게는 모든 팬들이 기다리는 숙적 ‘그’와의 대결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따르면 ‘그’의 캐스팅에는 마크 해밀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데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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