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 지적인 묵시록, 최고의 사극 스릴러

번지 점프를 하다 - 경계선 위의 아슬아슬한 사랑

최고입니다. 더 이상 다른 표현이 필요 없습니다. ‘혈의 누’를 보고 극장에 나서며 저는 온몸에 돋아나는 전율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입에서는 연신 흐뭇한 찬탄이 나왔습니다. 연쇄 살인 스릴러의 전범처럼 꼽히는 ‘세븐’이나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스릴러 ‘살인의 추억’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19세기 초반, 제지소가 있는 섬 동화도에서 종이를 공물로 바치기 위한 배가 불타고 한 사내가 창에 꽂혀 죽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 차사(최종원 분)와 함께 파견된 군관 이원규(차승원 분)는 제지소를 소유했던 객주 강승률(천호진 분)의 7년 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로 5건의 연쇄 살인이 예고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화려한 빨간 색이 아니라 검붉은 선혈이 영화의 전체를 좌우하는 ‘혈의 누’는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에서 가치관의 혼란으로 인해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조선 후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분제와 평등 사상, 서학(천주교)과 무당, 수발총(부싯돌로 점화하는 총)과 창, 귀신에 대한 두려움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대책으로 자유로운 포교를 위해 서구 열강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1801년의 황사영 백서 사건이나 노론과 남인의 붕당 대립, 중인 계층의 성장 등 당시의 역사적 고증도 촘촘하게 서사구조 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지식은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모르더라도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영화를 보며 황사영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직업적으로 황사영 백서 사건(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있었던 제 입장에서는 ‘혈의 누’가 단지 잔혹함과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으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지적인 배경을 뒤에 받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이같이 혼란스러운 시대 배경 속에서 예고된 살인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우물에는 피냄새가 진동하며 영화는 묵시록에 근접합니다. 합리적으로 수사하던 이원규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이 사건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으로 변화합니다. 초반부에 일견 완벽해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변모해가는 것이 스릴러의 정석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코미디에 익숙해져 진지한 연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던 차승원의 호연 덕분에 첫등장에서 그의 얼굴만 보고 웃었던 관객들은 속도감 넘치는 전개 속에서 영화 속으로 몰입하게 됩니다.

제지소를 운영하는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김인권(박용우 분)과 강승률 객주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두호(지성 분)와 같은 젊은 배우들이 스토리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 가지만 김인권의 아버지이자 섬마을의 유지인 김치성 영감 역의 오현경과 최 차사로 등장하는 최종원,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강승률 역의 천호진의 연기가 더 좋았습니다. 등장 시간은 길지 않지만 묵직하게 사극 스릴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지적이며 묵시록적인 ‘혈의 누’(피눈물)의 제목이 붙여진 이유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고어 장면에서 밝혀집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명하기 보다 검붉은 색에 가까운 선혈과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잔혹하기보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싶은 호기심이 더욱 강렬하게 유발되는 살해(혹은 처형) 장면들은 dvd가 출시되면 반드시 제작 과정이 서플에 포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 이은주의 영화 데뷔작 ‘번지 점프를 하다’ 이후 4년만에 걸작 스릴러를 선보인 김대승 감독의 다음 필모그래피는 어떤 작품일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by 디제 | 2005/05/09 03:26 | 영화 | 트랙백(3)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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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どこまでも夢の彼方 at 2005/05/10 01:30

제목 : 혈의 누 재미있다! >_<
주말에 무대인사 보러 갔다왔어요! 사진은 못찍었지만... ...아니 뭐 사실 별로 찍을 것도 없더군요. 감독께서,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 보니까 돈벌고 싶어서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러던데 돈 벌고 싶었으면 액션컷이라도 더 찍었지..." 하는 말도 하시더군요. 뭐 우리나라 사람들 헐뜯기 문화가 어디 가겠습니까마는. 악평을 많이 접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간 탓인가 몰라도, 정말 최고☆ 였습니다. 일단 가장 많이 하는 소리가 "잔인하다" "목을 왜잘라" 뭐 이런 소리 같은데... 안그래도......more

Tracked from 남쪽바다의 푸른심장 at 2005/05/20 08:51

제목 : 「혈의 누」봤습니다.
스토리 탄탄하고, 인물들 연기도 훌륭하고, 게다가 다크한 것이 딱 제 취향이었습니다만....... 영화 반쯤 보고 난 후부터 계속 드는 생각이, 강우석 씨, 꼭 그렇게 피로 도배를 해야 했어요.................?-_-; 저는 워낙 폭력에 찌든 인생 CSI 등으로 단련이 된 몸이라 윽윽 하면서도 한 장면도 안 놓치고 끝까지 봤습니다만, 같이 갔던 친구는 못 견디고 도중에 나가 버리더군요. 반전이며 등등 결정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다 놓쳤다지요. 친구가 영화 끝나자마자 물어보는 말이 "그래서 범인이 누구였어......more

Tracked from 내 청춘의 불꽃놀이 at 2007/04/22 20:58

제목 : 195. 혈의 누 (血의 淚)
김대승 감독 / 차승원, 박용우, 지성, 윤세아 주연(2007. 4)니놈같은 의원놈들이 왜 먹고사는 줄 아나? 그건 네놈들의 재주가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질기기 때문이야!조선 시대로 간 형사 스릴러. 천주교의 전래 시기를 배경으로 외딴 섬 동화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술. 심혈을 기울인 당대의 고증 만큼이나, 역설적이게도 당대 현실을 살짝 빗겨가며 인물들의 개성을 살린 ......more

Commented by 솔리드 at 2005/05/09 08:50
내용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자주 들리겠읍니다..
Commented by SDPotter at 2005/05/09 10:41
오옷! 개봉일날 보러갔다가 매진이 되어서 못봤는데 이번에 꼭 친구들과 보러가야겠네요^^
Commented by 자유로운영혼 at 2005/05/09 11:19
저도 아직 보진 못했는데... 글 잘 읽구 갑니다...
Commented by kinder at 2005/05/09 12:35
잔인한 장면이 나올때마다 고개 박던 친구가 나오면서 최고!!!
저 역시 겁이 많은 관계로 보고 싶은 부분만 봤어요.
Commented by 닥터지킬 at 2005/05/09 12:40
영화 잘 만들어졌더군요. 김대승 감독 입장에선 어려운 도전이었을텐데 좋은 결과로 연결되었으면 합니다.
Commented by MMgom at 2005/05/10 17:15
트랙백되있는것보고 찾아왔습니다.
5번째 형벌을 제대로 보지 못한것이 한이로군요...
Commented by 디제 at 2005/05/11 15:37
솔리드님/ 자주 놀러오십시오.
SDPotter님, 자유로운영혼님/ 네, 꼭 보세요.
kinder님, MMgome님/ 돈내고 보러갔는데 눈을 가리면 돈아깝지 않나요? ^^;;;
닥터지킬님/ 저도 개인적으로 웰메이드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detective at 2005/05/11 16:13
혈의누. 이 영화를 저희 지역에서 촬영을 해서 한번 가봤는데. 역시 차승원씨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저도 꼭 보고 싶었지만 나이제한의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안될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Eskimo女 at 2005/05/13 22:52
이 영화 보면서, 차승원이 점점 더 짐 캐리처럼 느껴졌어요.
짐 캐리 좋아하거든요. 코미디 뿐 아니라 진지한 영화에서 더!
Commented by 디제 at 2005/05/14 14:48
detective님/ 미성년자 관람 불가로 막기에는 아쉬운 작품입니다. 교육적으로도 조선 후기 상황을 정말 잘 표현했는데 말입니다. 야한 장면도 없는데 아쉽더군요.
Eskimo女님/ 짐 캐리보다 차승원이 낫지 않나요? 훨씬 더 볼만하죠. 사람들이 차승원 첫등장 장면에서는 그냥 웃어버리더군요. 워낙 코미디 영화에 많이 등장해서 그런가봅니다.
Commented by arkardie at 2005/05/20 08:52
제가 직접 쓰는 것보다 훨씬 정리를 잘해 주셔서 트랙백 쏩니다.^^
Commented by 디제 at 2005/05/20 18:07
arkardie님/ 과찬이십니다. 트랙백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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