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쟁호투 - 이소룡의 아우라, 드디어 필름으로 만나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브루스 리’가 아니라 ‘이소룡’이라고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보다, 아시아권에 널리 통용된 중국식 예명을 사용해야 그의 진정한 아우라를 인정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했지만, 그의 유명세를 접하고 한참 뒤에야 ‘아니, 이소룡이 죽은 사람이었단 말야?’라고 사망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소룡이 죽었을 리 없어!’라며 그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절하여 신화로 남은 사람은 불사조로 각인되기 마련인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소룡입니다.

이소룡의 실질적인 유작 ‘용쟁호투’를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MBC TV의 명절 특선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dvd를 구입해 이미 포스팅한 바 있지만, 아직껏 이소룡의 출연작을 필름으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극장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그의 괴성과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쌍절곤 묘기를 필름으로 접하고픈 소망이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의 ‘와이드스크린 영화 특별전’을 통해 ‘용쟁호투’를 드디어 필름으로 만났습니다. 구 허리우드 극장인 서울아트시네마의 관람 환경은 이미 일반화된 멀티플렉스에 비해 낙후된 것이 사실입니다. 의자가 작고 불편한데, 앞좌석과의 간격이 좁고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앞좌석의 관람객이 허리를 곧추세우기라도 하면 스크린을 가립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모처럼 꽃피기 시작한 예술 영화 붐이 IMF로 인해 소멸해 버린 아픈 경험을 회상하면,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비영리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입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문화예술계 전반에 군사정권 시절과 같은 독재의 퇴행이 몰아치고 있어, 서울아트시네마 역시 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새로운 프로그램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맞이해주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와이드스크린 영화 특별전’을 통해 상영되고 있는 7편의 영화 중 ‘용쟁호투’는 가장 작품성이 처지는 영화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소룡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필름을 통해 스크린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35년도 더 된 무협영화를 매끈한 멀티플렉스에서 관람하는 것은, 이미 신혼을 한참 지나 아이 엄마에 익숙해진 아내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구수한 서울아트시네마야말로 ‘용쟁호투’의 완벽한 관람 환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아우라를 체험하기 위해 모인 다국적의 관람객들이 스크린을 지켜보는 가운데, 불로불사의 이소룡은 마음껏 쌍절곤을 휘두르고, 와이드스크린을 꽉 채우는 시원시원한 발차기로 불사조임을 과시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는 20대 초반의 여성 관객이 ‘이소룡, 뼈밖에 없어서 안쓰러워. 그래도 정말 멋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으며, 그의 아우라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으며, 스크린 속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당산대형 - 이소룡 신화의 시작
정무문 - 쌍절곤으로 일본인들을 때려 눕히다
맹룡과강 - 중화 세계의 수호자 이소룡
용쟁호투 - 이소룡 주연의 블록버스터

by 디제 | 2009/11/08 09:34 | 영화 | 트랙백

요짐보 - 리메이크가 넘볼 수 없는 오리지널의 매력

※ 본 포스팅에는 ‘요짐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1964년 작 ‘황야의 무법자’와 월터 힐 감독,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1996년 작 ‘라스트맨 스탠딩’의 원작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61년 작 ‘요짐보’를 서울아트시네마의 ‘와이드스크린 영화 특별전’을 통해 드디어 필름으로 만났습니다.

줄거리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산쥬로라는 가명을 쓰는 사무라이(미후네 도시로 분)가 두 폭력 집단이 판을 치는 마을에 들어가 양쪽을 넘나들며 모두 파멸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라스트맨 스탠딩’을 가장 먼저 접했고, ‘황야의 무법자’를 관람한 다음, 이번 기회에 ‘요짐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화려한 액션으로 대변되는 헐리우드 웨스턴으로 거듭난 두 리메이크의 오리지널이기에, ‘요짐보’ 역시 활극의 요소로 가득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산쥬로가 활약하는 격투 장면은 세 장면 밖에 없으며,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 할애된 시간도 짧습니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산쥬로의 격투 장면은 매우 속도감 넘치게 연출되어,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누가 어떻게 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1대 다수의 격투 장면을 롱테이크로 매끄럽게 소화한 미후네 도시로의 액션 연기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운명, 그리고 역사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라면 으레 떠오르는 요소들이 ‘요짐보’에서는 깨끗이 배재되어 있어, 완벽한 오락 영화라 할 수 있는데 현시점에서 보면 액션보다는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가뜩이나 공간적 배경이 작은 마을이라 연극적 느낌이 강하며, 등장인물들 또한 인간의 이기심을 고발한다기보다 마치 만화의 캐릭터들처럼 희극적인 개성을 발휘합니다.

양대 세력이 으르렁거리며 일촉즉발로 대립하는 순간, 높은 망루 위에서 굽어보며 즐기는 산쥬로의 모습은, 그가 견지하는 방관자적 입장을 대변하는 명장면으로, 리메이크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모든 활극의 영웅적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그도 감금과 린치를 피할 수 없지만, 그 위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에서 산쥬로는 자신과 여유가 넘치는 남자다운 인물로, 미후네 도시로의 배우로서의 마초적 매력을 극대화하여 발산합니다.

두 편의 헐리우드 리메이크에 비해 오리지널만의 압도적인 매력은 조연급 캐릭터들의 개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황야의 무법자’와 ‘라스트맨 스탠딩’에서는 주인공과 라이벌 의 대립 구도 외에는 다른 조연급 캐릭터들이 평면적이었던 것과는 대별됩니다. 산쥬로의 최대 라이벌인 총잡이 우노스케(나카다이 타츠야 분)는, 광기와 예리함이 결합된 개성 넘치는 악역입니다. 우노스케의 권총에 맞서 산쥬로는 사무라이라면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기책인, 식칼로 격퇴합니다. 산쥬로의 식칼은 ‘황야의 무법자’의 조(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에게 철판으로 계승된 바 있습니다. 우노스케의 형인 얼간이 이노키치로 분한 가토 다이스케의 우스꽝스런 표정 연기도 압권입니다. 가토 다이스케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축조술에 능한 시치로지로 출연한 바 있는데, 시치로지의 상관이자 7인의 사무라이의 리더였던 캄베이 역의 시무라 다카시가 입을 잔뜩 일그러뜨린 탐욕스런 양조업자 도쿠에몬으로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입니다.

이처럼 강렬한 캐릭터들을 뒷받침하는 사토 마사루의 음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무라이 활극의 전형적인 배경 음악인 일본의 전통 음악 스타일에 머무르지 않고, 흥겨운 재즈 풍으로 편곡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흑백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 전반에 독특한 리듬을 창조합니다.

라쇼몽 - 변덕과 욕망, 허위와 거짓
이키루 - 관료주의 vs 시한부 인생
7인의 사무라이 - 시민 계급의 등장
거미집의 성 - 배신으로 일어선 자, 배신으로 망하다
란(亂) - 셰익스피어와 불교적 세계관의 조우
란(亂) - 필름으로 만난 압도적인 걸작

by 디제 | 2009/11/07 08:31 | 영화 | 트랙백 | 덧글(1)

리메이크 미드 V(브이) - 제1부 PIOLT

1983년 미국에서 5부작의 제1부제2부가 방영된 이래, 26년 만에 동일한 제목의 리메이크 드라마 ‘V’가 ABC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리메이크 ‘V’는 예고편을 통해 예상했던 바와 같이 오리지널의 요소들을 해체 및 재조합하고, 최근 미국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경향과 CG를 비롯한 특수 효과를 가미한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전 세계 29개 대도시에 출현한 외계인의 거대 UFO 중 최고지도자 애나의 모선이 뉴욕의 상공을 점거하는데, 오리지널의 주배경이 LA였던 것과는 다릅니다. 진동으로 인해 십자가가 추락하는 장면과 라이언의 청혼 반지가 흔들리는 모습은, 외계인으로 인해 신성이 추락하고 라이언의 청혼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리메이크의 UFO 등장 장면에 아쉬움이 있다면 미국과 브라질, 런던과 파리, 카이로 등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의 도시들이 등장했지만 아시아의 도시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뉴욕의 UN 빌딩 옥상에서 UN 사무총장과 존이 만나며, 지구인과 외계인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동영상을 활용한 간접적인 수단으로 애나가 지구인들에게 첫선을 보입니다. 매력적인 애나의 연설은 즉시 지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의 허점을 활용해 지구인들의 마음을 얻는 애나는, 의료보험 제도의 개선을 약속한 오바마를 풍자한 것이라는 미국 내의 흥미로운 평도 있습니다. 애나가 오리지널의 다이애나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데, 상관이었던 존과 파멜라와 권력 다툼을 벌여야했던 다이애나와 달리, 현재까지 애나의 상관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983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백인인 레이건이었고, ‘V’의 다이애나는 백인 여성이었는데, 2009년 현재 미국 대통령은 흑인인 오바마이고, 애나로 흑인 여배우인 모레나 바카린이 캐스팅된 것은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합니다. 오리지널에서 존은 화학합성물을 만들기 위해 지구를 방문했다고 목적을 밝혔지만, 리메이크에서 애나는 지구에서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화학합성물이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물과 식량(인간)을 확보했던 오리지널에 비해, 리메이크의 외계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공유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떠나겠다고 피력한 것은 오리지널과 동일합니다. 외계인들에게 성(姓)이 없이 이름만 있는 것도 오리지널과 같습니다.

리메이크에서는 외계인들을 가리켜 ‘Visitor’의 머리글자를 따 ‘V’라 부르는데, 오리지널의 극중에서 ‘V’는 레지스탕스의 승리(‘Victory’)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따라서 ‘V’자 핏빛 낙서가 저항을 의미했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외계인들을 숭배하기 위한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외계인을 목소리의 에코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리메이크의 외계인의 목소리는 지구인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는 귀 뒤의 피부를 절제하여 두개골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외계인 여부를 확인했는데, 피부를 절개하는 것도 ‘V’자형입니다.

외계인의 모선과 수송선의 디자인은 보다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띠며 디테일이 추가되었지만, 확실히 오리지널의 이미지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복도와 방, 그리고 인간을 식량으로 보관하는 대형 냉동 창고와 식수 창고를 제외하면 답답한 느낌을 주었던 오리지널의 모선의 내부와 달리, 리메이크의 모선의 내부는 타일러가 매료되었듯이, 탁 트여 개방적이며 유토피아와 같은 도시입니다. 외계인들의 복장도 일신했습니다. 붉은 군복과 커다란 고글. 검정 가죽 장화의 고압적인 오리지널의 외계인들의 복장은, 리메이크에서는 전문직 종사자의 깔끔한 정장 스타일의 근무복처럼 바뀌었습니다. 제1부에서 이미 권총 타입과 소총 타입의 2종류의 외계인의 총기류가 등장했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아직 외계인의 총기류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감시와 살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소형 비행 병기는 리메이크만의 신설정입니다.

애나에 맞서는 여주인공은 철없는 10대 후반의 외아들을 둔 싱글맘인 FBI의 대 테러 요원 에리카입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줄리엣과 다이애나 두 라이벌이 모두 과학자였는데, 리메이크에서는 에리카와 애나 모두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에리카가 FBI의 요원인 것은 9.11 테러 이후, 미국 본토에서 자행되는 테러와 음모론이 미국 드라마의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주인공의 수사 능력을 활용한 스릴러가 리메이크의 주된 장르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거대 UFO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외계인이 지구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설정은, ‘맨 인 블랙’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 등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설정이지만, 거대 모선을 통한 대규모 등장이 외계인의 최초의 등장이었던 오리지널과는 차별되는 것입니다.

오리지널 제1부에서 외계인의 정체를 마이크가 밝혔던 것처럼, 리메이크에서는 에리카가 그 정체를 밝혀냅니다. 마이크가 격투 끝에 가면을 벗긴 것이 생면부지의 외계인이었던 것과 달리, 에리카는 신뢰했던 파트너 데일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가면을 벗깁니다. 짙은 초록색의 오리지널의 외계인의 원색의 피부색에 비해, 리메이크의 외계인의 피부는 검정색에 가깝습니다. 오리지널에서 외계인의 두 눈은 가면의 두 눈의 위치와 동일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뒤통수에 가깝게 파충류의 눈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에리카는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 가톨릭 신부 잭과 만나는데, 자신이 추적해온 용의자가 외계인임을 확인합니다. 잭과 함께 근무하는 성당의 노신부는 외계인의 방문으로 인해 신자 수가 늘어난 것에 반색하지만, 잭은 외계인의 존재와 바티칸의 안일함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예고편을 통해 예상했던 것보다는, 신과 외계인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지 않았는데, 잭은 오리지널의 앤드류 신부의 직업을 계승했지만, 조연에 불과했던 앤드류 신부보다는 마이크에 가까운 주인공입니다.

예고편을 통해 오리지널의 마이크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던 의문의 사나이 라이언은, 실상은 오리지널의 마틴이었습니다. 라이언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리메이크 ‘V’ 제1부의 최대 반전이었습니다. 오리지널 5부작이 종료될 때까지 마틴은 ‘선한 외계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파충류의 피부가 드러난 적이 없는데(존과 다이애나, 브라이언, 심지어 윌리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외계인 캐릭터들이 파충류의 피부를 노출한 것에 비하면 마틴은 특별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후속 19부작에서 마틴이 다이애나에 의해 살해당할 때, 파충류의 피부를 노출합니다.), 라이언은 처음부터 파충류의 피부를 드러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리지널에서 마이크는 이혼남이었고, 줄리엣은 남자친구와 동거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라이언에게 동거녀 발레리가 있으며, 에리카는 이혼녀(혹은 남편과 별거 중)로 성(性)이 뒤바뀌었습니다. 라이언과 발레리를 둘러싼 예상 가능한 전개는, 발레리를 동족에게 잃으며 라이언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기폭제가 되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발레리가 라이언의 정체를 눈치 채고 스스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의사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끝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줄리엣과 동거남의 사이와 비슷해집니다. 하지만 라이언이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발레리가 결별을 결심한다면, 리메이크는 ‘디스트릭트9’처럼 ‘차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요구받을 것입니다. 오리지널에서 마이크와 마틴의 관계는 리메이크에서 조지와 라이언의 관계로 계승되었는데, 오리지널의 내러티브가 마틴보다 마이크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리메이크에서는 조지보다 라이언을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리지널에서 마틴은 다이애나의 부관이었는데, 라이언은 애나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라이언이 설령 애나와 구면이 아니라 해도, 다른 외계인 캐릭터들과 분명 관련을 맺고 있을 것입니다. 라이언 니콜스는 지구인 행세를 위한 가명으로 보이는데, 성(姓)이 없는 외계인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타일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친구 핑계를 대는 철없는 10대로, 외계인에게 매혹당하고 리사에게 반해 ‘외계인의 평화 대사’가 되는데, ‘외계인의 친구들’이 되어 제복을 지급받고 앞잡이가 된 오리지널의 다니엘이나 ‘개조’되어 스파이가 되었던 마이크의 아들 숀을 연상시킵니다. 제2부의 예고편을 보면, 타일러가 리사와의 섹스를 통해 정자 제공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리사가 타일러에 접근한 것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인과 외계인의 혼혈을 출산하기 위한 외계인의 거대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럴 경우 타일러는 단순히 다니엘이 아니라, 외계인 혼혈아 출산을 위한 대리모가 되었던 로빈과 같은 위치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리메이크에서 외계인 혼혈아의 어머니는 리사가 될 텐데, 그녀의 이름 리사가 엘리자베스의 애칭인 것에 주목합니다. 엘리자베스는 히브리어로 ‘신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닌 구원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오리지널에서 지구 멸망을 막았던 외계인 혼혈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따라서 리사는, 케네스 존슨이 각본에 참여한 리메이크 제작진의, 차후 전개를 암시하는 의도적인 작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출세를 꿈꾸는 언론인 채드는 오리지널의 크리스틴이 남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채드는 애나와의 인터뷰를 통해 외계인의 대변인이 되는데,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지니고 있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전 세계적으로 외계인의 정체를 폭로하는 보도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채드가 외계인과 레지스탕스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면, 리메이크 ‘V’가 보다 매력적이고 복잡한 스릴러가 될 것입니다. 한편, 그가 애나의 호감을 샀던, ‘모든 외계인의 외모는 매력적이다’라는 언급은, 파충류의 원래 피부 위에 지구인의 가면을 덮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현대의 성형 수술을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제2부의 예고편을 보면, 잭은 외계인에게 검거되어 ‘개조’를 당하고, 에리카가 격투 끝에 죽인 데일이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외계인들이 얼마든지 가면을 바꿔 쓸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1부만 보면 오리지널의 충실한 리메이크이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을 가미하여 만족스러웠는데, 최근 미국 드라마들이 초반에는 흥미진진하다, 마구 벌여놓은 암시(소위 ‘떡밥’)들을 주체하지 못해 음모론에 의존한 나머지 용두사미로 전락했던 것이 비일비재했었음을 감안하면, ‘V’는 내년 3월 이후 이어지는 시즌에서 깔끔한 종결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리뷰를 시작하며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1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2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3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4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5부

by 디제 | 2009/11/06 09:25 | 영화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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